제 삶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요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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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때 어머니를 사고로 잃고 그 후 십년 가까이 치매인 아버지를 곁에서 돌봐드렸습니다. 언니, 오빠들은 모두 결혼했고, 저는 직장생활을 하며 조카들까지 돌보느라 젊은 날을 다 보냈습니다. 서른다섯 살이 된 지금 결혼까지 결심한 남자는 부모가 반대하자 저를 피합니다. 몇 번이나 이별을 선언했지만 너무 오랜 인연인지 잘 정리가 안 됩니다. 저에게 힘이 되어주기 보다 힘들게 하는 존재가 된 사람에게 왜 이리도 집착하게 되는지, 그런 저 자신이 밉습니다. 전생에 죄가 많아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형제들에게도 끝없이 베풀어야 하고 남자복도 없는 건가 싶기도 하구요. 평생 동안 저를 위한 삶을 살아보지 못해서인지 정말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 삶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요?


지금 법우님의 그 상황에 대해 '괴로움'이라고 딱 낙인찍어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될 수 있다면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도록 노력을 하십시오. 그 상황은 하나의 상황일 뿐이지 거기에 좋고 싫은 분별을 갖다 붙이지 마세요. 전체 삶을 놓고 보았을 때 법우님이 처한 역경은 오히려 삶에 큰 도움을 주는 그런 경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전체 생을 놓고 볼 때 말입니다. 지금 상황이 많이 힘들고 괴롭지만 벗어나려 너무 애쓰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노력하세요. 그러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생겨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상담을 올렸다는 자체가 내면에 큰 삶의 희망과 빛을 피워 올리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분명히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지 말기 바랍니다. 지금의 이런 상황들이 언젠가는 고맙고 감사한 일들로 다가올 것입니다.

지금 법우님이 괴로워하는 경계처럼, 우리가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만 하는 괴로움들은 저마다의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에 찾아옵니다. 그 아픔과 괴로움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겉에 드러난 것과는 다르게 나를 괴롭히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진정으로 살려 주기 위해, 나를 돕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역설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법계의 배려요, 자비스런 진리의 방식인 것입니다. 조금 더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그런 역경이야말로 내 안의 어둡고 탁한 업장을 맑혀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그러나 최선의 방법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실 그 경계는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이고, 고통임과 동시에 희망과 행복의 소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실 최악의 상황은 언제든 최선의 상황으로 역전되기 쉽습니다. 최악의 괴로운 상황은 오히려 전혀 새로운 삶의 전환을 위한 아주 적절한 자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법우님처럼 괴로움 속에서는 무언가 변화에 대한 갈망이 평범한 사람들 보다 몇 배 이상으로 커집니다. 기도를 해도 그 힘이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크고, 수행을 하더라도, 아니면 어떤 의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지라도 그 에너지는 평균을 훨씬 넘어서 초월하곤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도 일반적인 사람보다는 거친 역경의 경계 속에서 ‘갈 때까지 가 본’ 사람이 그 밑바닥의 경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마음을 내게 되고 그 마음의 에너지는 일상적인 것을 뛰어넘기 때문에 한 생각으로 세상을 초월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눈에 최악의 괴로운 상황은 오히려 최고의 역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란 공평한 것이고, 우주의 에너지는 평등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위대한 인물을 살펴보면 대개 처음부터 평범했던 사람보다는 인생의 어느 한 순간 크나큰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다가 그 터널을 뚫고 나옴과 동시에 영적인 의식의 전환을 이루어 한 세상을 풍미한 경우가 더 많은 것도 그 연유입니다. 사실 어떤 한 경계에서 가슴 아픈 경험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삶의 성숙과 지혜와 용기와 자비라는 덕목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기 어렵습니다.

불교의 인과와 업의 이치를 보더라도, 역경과 괴로움을 통해 과거 전생의 악업을 크게 녹여야지만 그 밝고 텅 빈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경(逆境)이 곧 순경(順境)이고 순경이 곧 역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역경과 순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으로 보았을 때 그 순간 괴로울 수도 있고,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의미를 깨우쳐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고통이 주는 의미와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마음속에서 역경이다 순경이다, 혹은 괴로움이다 즐거움이다, 이렇게 나누어 놓는 마음만 없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경계는 그저 분별없는 텅 빈 경계일 뿐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계를 가지고 역경이다 순경이다 하겠습니까? 다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분별심일 뿐 이 법계는 항상 공평하고 여여합니다. 나쁠 때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가 가장 좋은 때일 수 있고, 좋을 때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젊어서 뿐 아니라 늙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생은 돈 주고 사서라도 해야 합니다. 그만큼 우리 인생을 값지게 만들어주고 우리 삶에 밑거름이 되어 주기에 그렇습니다.

항상 성공만하고 항상 마음대로 하고 살아온 사람, 실패나 역경을 경험해 보지 못 한 사람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겠습니까. 수많은 실패를 이겨내고 비틀비틀 쓰러질듯 하다가도 오뚝이처럼 당차게 일어설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내면에 힘이 딱 서게 됩니다.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경계에도 속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내면의 중심이 잡힌 그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어떤 괴로운 경계가 왔을 때 '괴롭다'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 그 경계의 고마운 점, 이익 되는 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순역의 양 극단의 분별을 다 놓아버리세요. 다 놓아버리고 내 앞에 다가오는 그 어떤 경계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받아들이겠다는 대수용의 정신 속에 업장소멸과 삶에 대한 대긍정이 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고마운 공부거리들입니다. 아무리 괴로운 상황일지라도 나를 공부시키기 위한, 나를 진화시키고 성숙되게 만들기 위한 법계의 배려로 바뀌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한없이 자유롭습니다. 역경도 순경도 아니고 다만 여여하고 평등한 하나의 순수한 경계일 뿐입니다. 순역의 경계,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계를 놓아버리고 무분별로 일체를 다 받아들이면서 자유롭고 당당한 걸음을 내딛으시기 바랍니다.

 


법상스님 『 기도하면 누가 들어 주나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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