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기도를 해야 하나?

2022-09-06
조회수 597


[질문]

 

스님 안녕하십니까?

오신지도 얼마 안되어서 이사준비 하시느라 많이 바쁘시겠습니다.
바쁘신 가운데 좋은 말씀 전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어제 불교TV에서 "청안스님의 ONE CHANCE ONE MIND"를 보다가

한 보살님께서 질문하기를 불교는 신을 믿지 않는 종교인데..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 이었습니다.

얼마전에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저의 친구가 자기는 수시로 기도를 한다.

특히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엊고 아이의 안녕과 미래를 위해서 기도를 했고

시간이 날때마다 기도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몰라도 큰아이는 이번 수시에 흔히 말하는 명문대에

그리고 둘째는 특목고에 합격하고

그 친구도 직장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너무 세속적이죠??? .. 다 자기가 지은 업을 받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저도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할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소 당황 스럽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아들의 머리에 손을 엊고 ... "공부 열심히 하고,, 등등,,,

남을 도울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요.

관세음보살" 하고는 머리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했는데 이래도 되는 것인지요.

흔히 어떠한 형태에도.. 형상에도.. 틀에도 갖히지 말라 했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알려 주십시요.

하느님께가 아니라,,, 참나에게로 해야 되는지,,,
또,, 청안스님께서 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시던데,,, 이해는 갑니다만..

우선은 저와 저가족,, 그다음에 이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가도 들고요...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예... 아주 좋은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기도는 말 그대로
'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빈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요?

먼저 첫째,
'빈다'는 것은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 바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고,
그것은 '지금 이 자리'가 아닌
먼 미래에 마음이 향해 있는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은 아직 충분하지 않고
미래의 무언가가 이루어질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특정한 기도성취의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에
집착을 가진 채로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기도를 하는 마음은
늘 '지금 여기'에 없고,
미래에 가 있습니다.

마음이 미래에 가 있으면
지금 이 순간이라는 최고의
평안과 고요와 성취의 자리를 놓치고 맙니다.

그리고 미래의 기도 성취에 마음이 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결과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모든 집착의 결과는
곧 괴로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결론은 어때요?
빌고 비는 것의 결과는 괴로움일 뿐더러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깨어있음을 방해합니다.

둘째로,
빈다는 것은
무언가가 지금은 궁핍하고 부족하다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의 나로써는
아직 만족스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어떤 성취를 통해
지금의 이 부족한 나를
조금 더 채워보겠다 하는 욕심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빌고 비는 마음은
곧 '결핍' '부족' '가난'을 의미합니다.

비는 마음 자체가
'나는 가난하고 부족하며 결핍되어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즉 가난한 마음, 부족하고 결핍된 마음을
자꾸만 연습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아들 시험에 붙게 해 주세요'
'남편 승진하게 해 주세요'

이게 뭐냐면
다 마음에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자꾸만 쌓아두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은 연습한대로 만들어져요.
이 우주법계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그린 것을
그대로 현실이 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핍을 연습하면
결핍이 만들어지고,
가난을 연습하면
가난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복적'인 기도, '기복불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저 '비는 것'은 기복불교밖에 되지를 못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거꾸로 하면 됩니다.

첫째는
미래에 무언가를 바라는 기도를 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충분히 깨어있기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기도하는 종교가 아니라
수행하는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을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바랄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있는 것들에 대해
충분히 누리고 만끽하고 만족하며
그 행복감을 느끼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족이고, 소욕지족, 만족이며
결핍과 부족이 아닌,
부유함과 풍요로움을 마음에 연습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부유함을 누리는 감각을 상실했어요.
사실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 보다
가지고 있는 것이 훨씬 많은대도 불구하고
가진 것에 대한 풍요로움을 더 많이 느끼고 살기보다는
못 가진 것에 대한 결핍감을 더 많이 느끼고 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우주법계는
내가 '바라는 것'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고 누리는 것'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평소에 무엇을 바라고 사는가.
무엇을 빌며 사는가,
그것이 아니라
내가 평소에 무엇을 누리며 사는가,
무엇을 느끼며 사는가,
바로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현재 있는 것, 가진 것이 주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느끼면
우주법계는 바로 그 누리는 것을
계속해서 보내줍니다.
그런데 계속 빌기만 함으로써
결핍을 연습하고 궁핍함을 느끼게 되면
우주에서는 계속해서 부족과 결핍을 선물 해 줄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 삶의 주된 방식이
이미 가지고 있는 그 많고 많은 소유를 누리고 사는 것 보다는,
아직 가지지 않은 몇몇의 것들에 대해
더 많이 바라고 사는데 더 익숙해요.

즉 현재 가지고 있는 90%는 별 의미를 못 느끼고,
감사함을 못 느끼고,
가지지 못한 10%에 대한 결핍감을
더 크게 느끼고 산다는 것이지요.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삶의 방식입니까?

그 90%의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는
맑은 공기며 아침 햇살, 실컷 마실 수 있는 물과
최소한의 의식주, 친구, 차 한 잔의 여유,
봄여름가을겨울의 아름다운 변화 등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지 못해서
4초에 한 명씩 5살 미만의 어린 아이가
지금 이 순간도 기아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도 아직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지 않은 것을 바라는 삶의 방식만을 고집하겠습니까?

그래서 기도의 참된 의미는
'감사'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 '더 가지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만족하고 감사하면 할수록
만족할 일이 더 자꾸 생겨나고,
감사할 일이 더 자꾸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주법계는
그렇게 그 사람이 누리는 것을
계속해서 보내주기 때문입니다.

이 법칙을 모르니까
결핍을 불러오는 '기복'을 행하는 것이지,
이 법칙을 알게 되면
풍요로움을 불러오는 만족과 감사와 나눔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삶을 살되,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이타적인 어떤 것을 위해서 마음을 내고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아상이 붙지 않고,
이기적인 마음이 붙지 않기 때문에
우주법계는 그 마음은 바로 보고 힘을 실어 주기도 합니다.

이것을 '기도'라고 하지 않고
'발원' '서원'이라고 부릅니다.

즉 무언가를 바라긴 바라는데
그것이 '나'를 중심으로 하는 아상의 기복, 기도가 아니라,
아상이 사라진
순수한 이타적인 사랑과 자비의 바탕에서
일어난 한 마음이라면,
그것은 개인의 복력을 뛰어넘어
우주법계의 일을 대신 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주적인 큰 힘이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무량대복이라는 무한복전이 열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자는
아상에 기초하는 이기적인 기복의 기도를 행할 것이 아니라,
아상을 뛰어넘는 이타적인 발원을 함으로써
이 우주법계에 회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서 방편으로 기도를 하라고 할 때도
'내 아들 건강하게 해 주세요'
'내 남편 승진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라고 하지 않고,
'아들 건강해 져서 이 사회에 큰 도움 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남편 승진하여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이들에게
큰 사랑과 지혜를 베풀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아도,
전자는 그 근본에 '나'라는 아상의 기복이 깔려 있지만,
후자에는 그 근본에
아상을 뛰어넘는 이타적인 사랑과 자비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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