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과 업의 차별, 장애인과 일반인의 차이?

202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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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삼보에 귀의하며 스님께 답을 청합니다.

오늘(2009-03-10)TV를 보다가 이런 뉴스를 들었습니다.
..."공무원이 장애인 복지기금 1억원을 횡령했다."

저의 반응은 "아니 저런 힘든 사람들 몫을 가로채다니 저런 공무원은 그 사람들의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살아서 받을 죄의 몫도 크지만 죽어서 어떻게 그 잘못을 치르려고 하나."라며 분노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이 "'불경-아비담마'에 의하면 장애인은 보통사람들보다

낮은 존재(물론 부처님이나 스님들보다는 훨씬 더 낮은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죄가 더 작을 수도 있다."라고 말합니다.

저도 부처님께 그리고 스님께 하는 보시가 다른 보시보다 공덕이 더 크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장애인에게 하는 보시가 일반인에게 하는 보시보다 공덕이 작은 것이 맞을까요?

일반인에게 하는 죄보다 장애인에게 하는 죄가 과보가 적을까요?

불경을 다 들춰볼 수도 없고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쩌면 '불교에서는 장애인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대한 명확한 답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명확히 태도를 취할 수 없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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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먼저 한 가지,
참고로 말씀드리면,
아비달마의 논서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많은 부파불교의 논사들과 스님들이
주석을 달아 놓은 주석서들인데요,
아비달마의 논서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자료는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너무 현학적이며,
심지어는 불법의 근원과 어긋나 있는 부분이 많다고 하여
후대에 그러한 잘못된 아비달마를 바로잡고자
파사현정(잘못된 것을 파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 하고자
대승불교가 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자료인지는 모르나
맹목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물론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뜻이 아닐까 싶네요.

장애인들이 일반인보다 낮게 태어난다는 것이
높고 낮음의 낮음이라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은 수미산처럼 높은 악업을
여러 생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조금씩 받는 반면에
장애인들은 이번 생에
한꺼번에 크게 받아들이겠다고 선택한 분들이라고 봅니다.

근본적인 가르침의 근본법 차원에서 본다면
그 어떤 존재도 높고 낮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대 평등의 가르침,
그것이야말로 이 가르침의 중심입니다.
하다못해 동물이나 식물이나
지구라는 대자연 또한
우리 인간보다 더 못한 존재이거나,
우리 인간을 위해 희생되어져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한생명이며,
한 뿌리이고,
한 가족입니다.

동물이나 식물도
심지어 무정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것 자체로
진리의 모습을 띄고 그 자리에서 있습니다.

모두가 다 법신부처님이
나투신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차원입니다.

그런데 중생의 차원,
업의 차원에서 보면
차별이 벌어집니다.

진리 그 자체는
완전한 대평등이고,
모두가 그대로 부처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그러한 동체의 일체 모든 존재를
높다 낮다
맞다 틀리다
좋다 싫다 하면서 차별합니다.

그런 차별심, 분별심에서
세상의 모든 차이가 벌어지고,
양 극단의 중도에서 벗어난
어리석은 사고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리의 차원에서 본다면,
즉 깨달음을 얻은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난한 것이나 부자인 것이나
별 차이가 없어요.

가난하든 부자든
외부적 요인이 좋든 나쁘든
전혀 상관 없이
깨달은 각자는
완전히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는 평가는 달라요.
그는 가난한 거렁뱅이에 불과하게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겉모습에 얽매여서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그것은 중생의 잘못이지
진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중생은 언제나 그르쳐요.

그러다보니
중생의 차원,
업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것이 나뉘어 집니다.

똑같은 행위를 해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과보를 가져옵니다.

똑같은 1백만원을 보시했어도
어떤 이는 백만원으로 돌아오고,
또 어떤 이는 5백만원, 1천만원, 1억원이상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나에게 욕을 했어요.
그런데 그 욕에 크게 휘둘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것이 큰 괴로움이 되고
그 둘 사이에 큰 업이 생기지만,
그 욕에 휘둘림이 적은 이에게
그것은 작은 괴로움이고
그 둘 사이에 업은 작습니다.

뚱뚱한 사람에게
'너 너무 뚱뚱해'라고 했다면
그것은 동일한 말이지만 큰 괴로움이 되지만,
너무 말라 스트레스 받는 이에게
그 말은 오히려 즐겁고 유쾌한 말입니다.

말 그 자체에 실체가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어떻게 분별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 그 업이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중생의 세계에서,
중생이 짓는 업은 기계적으로
a라는 업은 a'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또 다른 b나 c라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다 중생의 차별심 때문입니다.

그러한 중생의 차별심의 차원에서 업이 벌어지는데요,
그렇기에 업의 차원에서는
높고 낮은 차이가 생겨요.

본래 부터 있어서 생기는 차별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에서 차별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그 차별심에 아파하니까 생기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환상으로 차별심을 만들고,
환상으로 그 마음에 빠져 괴로워하는 꼴이지요.
그러니 그 환상을 깨더라도
환상으로 만든 것을 환상으로 깨고
스스로 즐거워하는 꼴밖에는 더 되지 않습니다.

그런 업의 차원에서는 물론 차이가 납니다.

악한 사람에게 보시를 하면
그 돈은 나쁜 일에 쓰이게 되고,
그것은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것이 바로 과보예요.

그러니 나쁜 사람에게 보시하면
그 공덕이 적거나,
없을 수도 있고,
오히려 나쁜 과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에게 보시하면
그것이 좋은 곳에 쓰일 것이니
그것은 좋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깨달은 각자에게 보시를 하면
그것은 대 해탈의 양분으로 쓰이고
그것은 만 중생을 해탈케 하고
모든 고를 없애주는
원만하고 아름다운 과보를 가져 올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 1천명에게 보시하느니
보통 사람 1명에게 보시하는게 낫고,
보통 사람 1천명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는
선한 사람 1명에게 보시하는게 더 낫고,
선한 사람 1천명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
수행자 1인에게 보시하는 게 낫고,
수행자 1천명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는
한 사람의 깨달은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다른 과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업의 차원에서
일반 사람과 장애인은
차이가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생이 부처님께 피를 내는 것 만으로
큰 죄업이 되지만,
일반인에게 피를 내는 것은
그만큼 큰 죄업은 안 될 수가 있어요.

이렇게 업의 차원은
그 결과가
엄연히 다르게 익어갑니다.

그래서 과보 할 때 '보(報)'라는 것이
'다르게 익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일한 행위, 동일한 업이
각각 다르게 익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B형 간염이 들어오면
건강한 이는 감기 좀 하다가 끝나지만
어떤 이는 간염으로, 또 어떤 이는 간경과, 간암으로까지
다른 결과를 익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르게 익느냐?
첫째는 행위의 주체에 따라 다르게 익습니다.

그 행위, 업을 행한 행위의 주체가 누구냐,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에 따라
동일한 업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부처가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찌꺼기를 남기지 않지만,
중생의 행위는 고스란히 업을 남깁니다.
보시하는 이의 마음에 보상심리가 없는 것과
계산이 깔린 보시를 하는 것은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행위의 대상에 따라 다르게 익어요.
부처님께 보시한 것이
일반인에게 보시한 것보다 더 결과가 큽니다.
악인에게 보시한 것보다
선인에게 보시한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맺게 합니다.
짐승보다는 사람에게 보시한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겠지요.
영적으로 각성되어 있을수록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아마도 바로 이 두 번째 다르게 익은 차원에서
일반인에게 행한 보시보다
장애인에게 한 보시가 결과가 더 적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또 세 번째로는
과보를 받는 시간에 따라서도 다르게 익습니다.
나쁜 업일수록 빨리 받는 것이 좋고,
좋은 업일수록 늦제 받는 것이 좋습니다.
업은 묵히면 묵힐수록 이자가 붙어서 늘어납니다.
그러니 좋은 것은 두면 둘수록 늘어나고
나쁜 것도 오래둘수록 늘어나니
나쁜 업은 될 수 있으면 빨리 받는게 좋습니다.

그러니 괴로운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지금 받으니 그나마도 그만큼만 받고 끝나는 것이지,
다음 생에, 다음에 받게 되면
그것보다 더 커지고 불어난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될 것 아닙니까.

네 번째로는
과보를 받는 공간에 따라 다르게 익습니다.
예를 들어 감기가 걸릴 업을 타고 났다고 한다면,
한국 같은 나라에서 감기가 걸리면
금방 나을 수 있어요.
그런데 소말리아 같은 곳에서는
감기만 걸려도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어요.

동일한 업을 지었을 지라도
어떤 공간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이처럼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업장소멸이라는 말은
사실 업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네 가지 다르게 익은 부분을
바꾸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 번 지은 업은 무조건 받아야 합니다.
받지 않고서는 없어지지 않아요.
그러니 사실은
업장은 소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불교에서는
업장소멸을 해야 한다고 하느냐?
사실 그것은 업장 소멸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업장소멸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감기가 걸릴 업이 있는데,
평소 복을 많이 짓고
베풀고 살았다면
그로 인해 한국같은 좋은 나라에 태어나서
잘 먹고 잘 살면서 살 수 있어요.
그러면 그 복으로 인해
감기가 걸려도 금방 치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못 지어서 소말리아 같은 곳에 태어나면
그걸로 죽을 수도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 결국은 복덕을 짓는 것이
업장을 소멸시키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또 똑같이 백만원을 보시했어도
마음에 상이 없으면,
즉 마음에 아상을 놓아버렸다면
그 과보는 무량히 많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업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조금 답변이 길어졌는데요,
답변 중간에서
그 답변이 주어졌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렇듯 업의 차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차별이 있을 수 있지만,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그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그 차별은 중생이 만들어 내는 것이지
진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의 마음에 따라
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애인을 대하는 중생의 마음이
장애인이라고 낮게 보고
얕잡아 보는 마음을 내게 된다면
그 마음으로 인해
나쁜 과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장애인을 대하는 마음이
부처님을 받드는 마음이 된다면
그 행위는 그대로
부처님께 한 공덕 같은 큰 결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장애인, 병자, 약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바로 부처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 속에서 부처를 보는 것이야말로
이 공부의
근본법을 완전히 깨닫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모든 존재를
풍요롭게 해 주는
부처님의 본 뜻에 부합하는 길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2009.03.10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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