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인데,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요?

202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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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죽으면 업보에 따라 윤회한다고 합니다.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윤회하는 주체는 과연 무엇인가요?


무아와 윤회에 대한 논란은 불교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온 질문이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전혀 모순되는 주장이 아니고 논란거리도 아닙니다. 먼저 [대장엄경론]의 말씀을 보지요. “과거세에 번뇌로 말미암아 여러 업을 지은 까닭에, 그 업에서 현재의 몸이 생겨났으며, 현재에 또다시 여러 업을 짓는다면 다음 생에 다시 그 업에 해당하는 몸을 받게 된다. 모든 조건이 결합되어 씨에서 싹이 트는 것과 같다. 씨에서 싹이 트기 위해서는 그를 돕는 조건이 필요하고 싹의 성장을 위해서는 씨가 없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씨와 싹의 관계에 있어서, 씨가 없어지는 점에서 볼 때에는 지속함이 없다고 해야 하지만, 싹이 나는 점에서 볼 때에는 단절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무아(無我)이지만 업보를 받아 윤회하는 것 또한 바로 이 씨와 싹의 관계와 같다."


무아라면 아무것도 없어야 할 텐데 윤회하는 주체가 있지 않은가, 그것이 ‘아(我)’가 아닌가 하고 묻지만, 윤회의 주체 또한 공하고 텅 빈 무아일 뿐입니다. 유식(唯識)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아뢰야식이라고 이름 붙여 놓았는데, 그 아뢰야식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연생기의 한 부분일 뿐, 실체적인 자아는 아닙니다. 아뢰야식은 그야말로 업들이 모여 있는 업장(業藏)이요, 장식(藏識)인데, 그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실체가 있어서 업장이 아니라 그냥 이름하여 업장이다, 아뢰야식이다 하고 임시로 이름 붙여 놓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업이란 말과 생각과 행동입니다. 말과 생각과 행동도 언제든 변하는 것이고 그러니 당연히 그 '업의 모임'인 아뢰야식도 변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이번 생에는 사람이었던 것이 다음 생에는 축생으로도 태어나고 육도윤회를 한다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육도윤회를 한다는 말은 그렇듯 업이 변화한다는 증거입니다. 씨에서 싹이 트면 씨는 사라지듯, 다음 생으로 윤회를 하면 전생의 ‘나’는 소멸합니다. 그러나 그 뿌리는 여전히 전생의 나였기에 단절되었다고도 할 수 없고 지속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끊임없는 변화만 있을 뿐,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서의 윤회만이 있을 뿐,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는 없습니다.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이지만 그 윤회의 주체 또한 변화하는 '무아' '공'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윤회하지만 무아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습니까? 윤회와 무아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습니다. 아주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이지요.



2014.05.17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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