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40≫
가족의 죽음,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까요?
가족의 죽음 ,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까요?
○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음을 겪은 많은 분들께서 치유할 수 없을 듯한 슬픔과 괴로움을 호소하시며 상담신청을 많이들 하신다. 참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낸 분들이 느끼는 가장 큰 괴로움은 바로 죄의식이다.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다거나 제대로 그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가장 클 것이다. 나 때문에 가족들이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거나, 그 책임이 온전히 나에게 있으니 더 이상 마음 편히 살 수가 없다거나 하는 이러한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되기 쉽다.
가족의 죽음에 죄의식이 느껴진다면, 가장 우선적으로 진정한 참회를 해야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참회란 사참회와 이참회 중 이참회를 해야한다는 말이며, 곧 진리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
가만 생각해보라. 우리에게 누군가를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그러한 힘이 과연 있을까? 세상에서 나고 죽는 일, 성공하고 실패하는 일, 혹은 그 외의 수많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일들을 과연 '내'가 하는 것이 맞을까?
이 죽고 사는 일은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연기적인 이 법계의 인연 속에서 죽음이 오고 태어남이 있을 뿐, 나의 의도대로 되는 일이란 없다. 그런대도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다'라고 착각하며 살기 때문에, 일이 잘못될 때, 나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근원으로 돌아가서 볼 때, 그 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근원으로 돌아가 진리를 깨달을 때, 이 모든 죄의식과 괴로움이 실체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깨달을 때 나와 인연 맺었던 사람들이 모두 함께 깨어나는 것이다. 이 우주 전체가 깨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깨어날 때 죽음이 실체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실은 그들의 죽음이 진짜 죽음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깨어나 진리를 살고 있는 나와 함께 늘 여전히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낱낱의 행위를 통해 그들이 늘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완전히 한 생명으로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 곧 나를 위해 복과 지혜를 터득하며 살아가야 한다. '나'라는 아상, 에고를 버리고 진짜 내가 누군지를 알게 되는 것, 불생불멸인 진리로 사는 것이 곧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내가 근원적으로 해탈할 때, 일체 중생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할 때 모든 노병사를 다 겪지만, 그 노병사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괴로움이 있으나 더 이상 괴롭지 않으며, 모든 일이 다 일어나지만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마조어록≫
#1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즉심즉불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조가 말했다.
"어린아이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울음을 그친 뒤에 어떻습니까?"
"비심비불이다."
"이 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찾아 오면 어떻게 지도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겠다."
"홀연히 이 속의 사람이 찾아올 때에는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큰 도를 직접 깨닫도록 해 주겠다."
스님의 강설
○
우는 아이를 달래 주기 위해 누런 낙엽을 황금이라 하며 보여주는 이야기가 <열반경- 영아행품>에 전한다. 그렇듯 '마음이 곧 부처- 즉심즉불'이라는 말 역시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라는 말이다.
우리 중생들은 스스로가 만든 환영의 괴로움에 빠져 마음으로 울고 있으므로, 그 가짜 괴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가짜 약을 방편으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곧 부처'라는 방편을 주는 것이다.
즉심즉불이라는 말 또한 방편일 뿐, 궁극의 진정한 해탈지에는 부처조차 붙을 자리가 없다. 한 티끌도 붙을 것이 없다. 그저 이러할 뿐.
○
울음을 그친 뒤에는 즉심즉불이든 비심비불이든 그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이미 괴로움이 사라진 이후에는 부처도 없고 마음도 없다. 그러할 때, 괴로움은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니다.
아무리 최악의 괴로움이라 할지라도, 그 또한 비교 분별에서 오는 것일 뿐. 그러니 그 비교 분별의 망상을 모두 내릴 때, 괴로운 일이 있으나 더 이상 괴롭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괴로움을 모두 여의고 눈앞의 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 수 있으려면, 오직 이 공부를 통해 깨닫는 수 밖에 없다. 그래야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오직 이 공부를 통해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스스로 자기를 깨달아야 한다.

#2
어떤 스님이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마조가 되물었다.
"바로 지금은 무슨 뜻이냐?"
스님의 강설
선문답에는 어떠한 정답이 없다. 늘 생생히 살아있는 바로 지금을 보여 줄 뿐, 정해진 답이란 없는 것이다.
실은 질문이 곧 답이다. 이미 답을 드러내며 질문을 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 지금 여기에 곧장 법이 드러남을 보이는 것이다.
그저 이렇게 매 순간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이니, 무슨 말을 한들 무엇이라 한들 법 아닌 것이 없으니, 선문답에는 그 어떠한 격식도 방법도 정답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 하나의 진리를 곧바로 눈치채야 할 것이다.
<법상스님 말씀>

10월 24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40≫
가족의 죽음,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까요?
가족의 죽음 ,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까요?
○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음을 겪은 많은 분들께서 치유할 수 없을 듯한 슬픔과 괴로움을 호소하시며 상담신청을 많이들 하신다. 참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낸 분들이 느끼는 가장 큰 괴로움은 바로 죄의식이다.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다거나 제대로 그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가장 클 것이다. 나 때문에 가족들이 죽음을 맞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거나, 그 책임이 온전히 나에게 있으니 더 이상 마음 편히 살 수가 없다거나 하는 이러한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되기 쉽다.
가족의 죽음에 죄의식이 느껴진다면, 가장 우선적으로 진정한 참회를 해야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참회란 사참회와 이참회 중 이참회를 해야한다는 말이며, 곧 진리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
가만 생각해보라. 우리에게 누군가를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그러한 힘이 과연 있을까? 세상에서 나고 죽는 일, 성공하고 실패하는 일, 혹은 그 외의 수많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일들을 과연 '내'가 하는 것이 맞을까?
이 죽고 사는 일은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연기적인 이 법계의 인연 속에서 죽음이 오고 태어남이 있을 뿐, 나의 의도대로 되는 일이란 없다. 그런대도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다'라고 착각하며 살기 때문에, 일이 잘못될 때, 나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근원으로 돌아가서 볼 때, 그 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근원으로 돌아가 진리를 깨달을 때, 이 모든 죄의식과 괴로움이 실체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깨달을 때 나와 인연 맺었던 사람들이 모두 함께 깨어나는 것이다. 이 우주 전체가 깨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깨어날 때 죽음이 실체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실은 그들의 죽음이 진짜 죽음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깨어나 진리를 살고 있는 나와 함께 늘 여전히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낱낱의 행위를 통해 그들이 늘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완전히 한 생명으로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 곧 나를 위해 복과 지혜를 터득하며 살아가야 한다. '나'라는 아상, 에고를 버리고 진짜 내가 누군지를 알게 되는 것, 불생불멸인 진리로 사는 것이 곧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내가 근원적으로 해탈할 때, 일체 중생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할 때 모든 노병사를 다 겪지만, 그 노병사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괴로움이 있으나 더 이상 괴롭지 않으며, 모든 일이 다 일어나지만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마조어록≫
#1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즉심즉불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조가 말했다.
"어린아이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울음을 그친 뒤에 어떻습니까?"
"비심비불이다."
"이 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찾아 오면 어떻게 지도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 주겠다."
"홀연히 이 속의 사람이 찾아올 때에는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큰 도를 직접 깨닫도록 해 주겠다."
스님의 강설
○
우는 아이를 달래 주기 위해 누런 낙엽을 황금이라 하며 보여주는 이야기가 <열반경- 영아행품>에 전한다. 그렇듯 '마음이 곧 부처- 즉심즉불'이라는 말 역시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라는 말이다.
우리 중생들은 스스로가 만든 환영의 괴로움에 빠져 마음으로 울고 있으므로, 그 가짜 괴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가짜 약을 방편으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곧 부처'라는 방편을 주는 것이다.
즉심즉불이라는 말 또한 방편일 뿐, 궁극의 진정한 해탈지에는 부처조차 붙을 자리가 없다. 한 티끌도 붙을 것이 없다. 그저 이러할 뿐.
○
울음을 그친 뒤에는 즉심즉불이든 비심비불이든 그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이미 괴로움이 사라진 이후에는 부처도 없고 마음도 없다. 그러할 때, 괴로움은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니다.
아무리 최악의 괴로움이라 할지라도, 그 또한 비교 분별에서 오는 것일 뿐. 그러니 그 비교 분별의 망상을 모두 내릴 때, 괴로운 일이 있으나 더 이상 괴롭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괴로움을 모두 여의고 눈앞의 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 수 있으려면, 오직 이 공부를 통해 깨닫는 수 밖에 없다. 그래야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오직 이 공부를 통해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스스로 자기를 깨달아야 한다.
#2
어떤 스님이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마조가 되물었다.
"바로 지금은 무슨 뜻이냐?"
스님의 강설
선문답에는 어떠한 정답이 없다. 늘 생생히 살아있는 바로 지금을 보여 줄 뿐, 정해진 답이란 없는 것이다.
실은 질문이 곧 답이다. 이미 답을 드러내며 질문을 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 지금 여기에 곧장 법이 드러남을 보이는 것이다.
그저 이렇게 매 순간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이니, 무슨 말을 한들 무엇이라 한들 법 아닌 것이 없으니, 선문답에는 그 어떠한 격식도 방법도 정답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 하나의 진리를 곧바로 눈치채야 할 것이다.
<법상스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