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를 버리고 삶으로 뛰어들기
법상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삶은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내 삶을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보여질 때도 있기는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 누구도 자기 삶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원한다고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는 없다. 죽고 싶지 않고, 늙고 싶지 않지만, 그것은 100% 반드시 찾아오고야 만다.
1시간 뒤에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해, 1주일 뒤에 이런 일 이 있었으면 좋겠어, 1년 뒤에 시험에서 합격해야 해, 사람들은 나에게 욕하지 말아야 해, 나는 성공해야 해 등등 이 무수히 많은, 매순간 올라오는 통제 욕구를 가만히 살펴보라. 너무나도 터무니없지 않은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삶을 완벽히 내 뜻대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고, 내 통제 아래에서 움직여주기를 바라지 않을 때, 그때 삶과의 투쟁은 비로소 끝이 난다. 그렇지 않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랄 때는, 그렇게 되지 않는 괴로움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과 같다. 그때마다 괴롭고, 화가 나고, 답답하고, 초조해야 할 것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삶을 통제하기를 멈추고, 추구하고, 바라고, 욕망하기를 멈추고, 그 모든 통제 욕구와 싸우며 사는 대신, 평화롭게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삶을 행복하게 누리며 살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준비된 괴로움이 없다.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가 늘 있는 바로 그것이 다. 삶은 늘 이러할 뿐이다.
내가 그저 이러한 삶에 대해 이렇커니 저렇커니 판단하지만 않으면, 삶은 있는 이대로 자연스럽다. 펼쳐지는 이대로, 벌어지는 이것이 곧 진리다. 더 이상 삶과 싸우 지 않게 된다.
언제나 삶은 완전하다. 삶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돌아갈 것이다. 이 거대한 삶과 다룬다는 생각 자체가,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삶을 삶 자체의 법칙에 따라 운행되도록 허락해주라. 현재가 곧 실재이며, 현실이 곧 진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속에 들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자체가 바로 진정한 나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가 거대한 삶 속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나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고, 잘되거나 안 되고, 행복하거나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나'라는 개체적인 자아는 없다. 무아(無我)!
당신은 그 '나'보다 훨씬 큰 존재다. 삶 자체, 이 우주 자체가 그대로 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삶을 통제하 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이유다. 통제하고자 하는 그 주체인 '나'가 실체가 아닌 허망한 관념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주어진 현실, 그 속에 온전히 뛰어들어, 그것을 살아주기를 선택해보라. 아니,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삶이 그렇게 펼쳐지고 있다. 삶은 이미 수 용되고 있다. 내가 억지로 받아들일 필요조차 없다.
다만 생각, 분별이라는 허망한 필터로 저 스스로 마음에 안 든다고 거부하려는 망상만 일으키지 않으면 될 뿐! 그러면, 그 어떤 다툼도 없다.
완전한 평화, 자유, 행복, 기쁨, 충만, 열반, 해탈, 지복, 극락, 천당, 그 무엇으로 불러도 좋을 이대로의 진실이 활짝 드러난다. 아니 이미, 언제나 삶은 그저 이러했음 을 문득 확인하게 된다. 본래 아무 일이 없었음을. 전혀 통제할 필요가 없었음을.
춥고 더운 그곳으로 가라
어떤 스님이 동산양개 스님에게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닥쳤을 때는 어떻게 피합니까?"
양개가 답했다.
"어찌하여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으로 가지 않느냐?"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이 어디입니까?"
양개가 답했다.
"추울 때는 너를 꽁꽁 얼어붙게 하고, 더울 때는 너를더 없이 답게 하라!"
괴로움이 오면 괴로움 속으로 뛰어들고, 추위가 오면 추위 속에서 꽁꽁 얼어붙게 하며, 외로울 때는 한없이 외로워하라. 지금 내 눈앞에서 경험되는 바로 그것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도록 하라. 그것이 불이법이며, 불이중도다.
지금 여기에 그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가 받아야 할 진리 다. 그 속으로 뛰어들 때, 그것과 내가 하나 되어, 둘로 나뉘는 괴로움은 사라지게 된다. 내가 바로 그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도 쉬우면서도 어려운 중도 수행 이며, 삶의 놀라운 치유법이다.
무엇이 오든 내 눈앞에 와 있는 이대로의 이것과 하나 되어 그 속으로 뛰어들라. 피해 달아나려 하게 되면, 지금 이대로의 진실과 내가 둘로 나뉘어 싸우게 된다. 영원히 그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 이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여, 이것과 살아줄 때, 지금 이것으로써 살게 될 때, 이것과 그것은 둘로 나뉘지 않는다. 어느 것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괴롭히는 대상이 바로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진정 동체대비의 자비심이 드러난다.
삶은 나를 온전한 자비로써 끌어안는다. 나는 나를 괴롭힐 수 없다. 삶은 나를 괴롭힐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 오는 것은 상관하지 말고, 눈앞에 드러나 있는 바로 이 삶 속으로 뛰어들어보라.
그것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영적인 진실과 하나 되는 길이다.
원문보기
https://buddhistculture.co.kr/46/?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Mjt9&bmode=view&idx=22431068&t=board
통제를 버리고 삶으로 뛰어들기
법상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삶은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내 삶을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보여질 때도 있기는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 누구도 자기 삶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원한다고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는 없다. 죽고 싶지 않고, 늙고 싶지 않지만, 그것은 100% 반드시 찾아오고야 만다.
1시간 뒤에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해, 1주일 뒤에 이런 일 이 있었으면 좋겠어, 1년 뒤에 시험에서 합격해야 해, 사람들은 나에게 욕하지 말아야 해, 나는 성공해야 해 등등 이 무수히 많은, 매순간 올라오는 통제 욕구를 가만히 살펴보라. 너무나도 터무니없지 않은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삶을 완벽히 내 뜻대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고, 내 통제 아래에서 움직여주기를 바라지 않을 때, 그때 삶과의 투쟁은 비로소 끝이 난다. 그렇지 않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랄 때는, 그렇게 되지 않는 괴로움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과 같다. 그때마다 괴롭고, 화가 나고, 답답하고, 초조해야 할 것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삶을 통제하기를 멈추고, 추구하고, 바라고, 욕망하기를 멈추고, 그 모든 통제 욕구와 싸우며 사는 대신, 평화롭게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삶을 행복하게 누리며 살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준비된 괴로움이 없다.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가 늘 있는 바로 그것이 다. 삶은 늘 이러할 뿐이다.
내가 그저 이러한 삶에 대해 이렇커니 저렇커니 판단하지만 않으면, 삶은 있는 이대로 자연스럽다. 펼쳐지는 이대로, 벌어지는 이것이 곧 진리다. 더 이상 삶과 싸우 지 않게 된다.
언제나 삶은 완전하다. 삶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돌아갈 것이다. 이 거대한 삶과 다룬다는 생각 자체가,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삶을 삶 자체의 법칙에 따라 운행되도록 허락해주라. 현재가 곧 실재이며, 현실이 곧 진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속에 들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자체가 바로 진정한 나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가 거대한 삶 속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나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고, 잘되거나 안 되고, 행복하거나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나'라는 개체적인 자아는 없다. 무아(無我)!
당신은 그 '나'보다 훨씬 큰 존재다. 삶 자체, 이 우주 자체가 그대로 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삶을 통제하 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이유다. 통제하고자 하는 그 주체인 '나'가 실체가 아닌 허망한 관념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주어진 현실, 그 속에 온전히 뛰어들어, 그것을 살아주기를 선택해보라. 아니,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삶이 그렇게 펼쳐지고 있다. 삶은 이미 수 용되고 있다. 내가 억지로 받아들일 필요조차 없다.
다만 생각, 분별이라는 허망한 필터로 저 스스로 마음에 안 든다고 거부하려는 망상만 일으키지 않으면 될 뿐! 그러면, 그 어떤 다툼도 없다.
완전한 평화, 자유, 행복, 기쁨, 충만, 열반, 해탈, 지복, 극락, 천당, 그 무엇으로 불러도 좋을 이대로의 진실이 활짝 드러난다. 아니 이미, 언제나 삶은 그저 이러했음 을 문득 확인하게 된다. 본래 아무 일이 없었음을. 전혀 통제할 필요가 없었음을.
춥고 더운 그곳으로 가라
어떤 스님이 동산양개 스님에게 물었다.
"추위와 더위가 닥쳤을 때는 어떻게 피합니까?"
양개가 답했다.
"어찌하여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으로 가지 않느냐?"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이 어디입니까?"
양개가 답했다.
"추울 때는 너를 꽁꽁 얼어붙게 하고, 더울 때는 너를더 없이 답게 하라!"
괴로움이 오면 괴로움 속으로 뛰어들고, 추위가 오면 추위 속에서 꽁꽁 얼어붙게 하며, 외로울 때는 한없이 외로워하라. 지금 내 눈앞에서 경험되는 바로 그것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도록 하라. 그것이 불이법이며, 불이중도다.
지금 여기에 그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가 받아야 할 진리 다. 그 속으로 뛰어들 때, 그것과 내가 하나 되어, 둘로 나뉘는 괴로움은 사라지게 된다. 내가 바로 그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도 쉬우면서도 어려운 중도 수행 이며, 삶의 놀라운 치유법이다.
무엇이 오든 내 눈앞에 와 있는 이대로의 이것과 하나 되어 그 속으로 뛰어들라. 피해 달아나려 하게 되면, 지금 이대로의 진실과 내가 둘로 나뉘어 싸우게 된다. 영원히 그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 이대로를 온전히 받아들여, 이것과 살아줄 때, 지금 이것으로써 살게 될 때, 이것과 그것은 둘로 나뉘지 않는다. 어느 것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괴롭히는 대상이 바로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진정 동체대비의 자비심이 드러난다.
삶은 나를 온전한 자비로써 끌어안는다. 나는 나를 괴롭힐 수 없다. 삶은 나를 괴롭힐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 오는 것은 상관하지 말고, 눈앞에 드러나 있는 바로 이 삶 속으로 뛰어들어보라.
그것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영적인 진실과 하나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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