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39≫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아름다운 삶
≪마조어록≫ #1
홍주의 수로 화상이 처음 마조스님을 참례하고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절하라."
수로가 엎드려 절을 하는데, 마조가 별안간 한 번 걷어 차버렸다.
여기서 수로가 크게 깨달았다.
일어나 손뼉을 치고 "하! 하!"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 참 신통하구나, 신통해! 백천 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다만 한 털 끝에서 곧장 다 알아버렸도다!"
곧 절을 하고는 물러가 뒷날 대중들에게 말했다.
"마조스님께 한 번 발로 채인 뒤로 지금까지 웃음이 끊이질 않는구나."
[마조어록] 중에서

스님의 강설
○
먼 거리를 돌고 돌아 마조스님을 참례하러 온 수로 화상은, 어서 빨리 법을 알아보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마조스님을 뵙자마자 급히 다가가 곧장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다. 그러자 마조는, 수로 화상의 급한 추구심을 달래고자 하며 ‘급하게 왔으니 절이나 먼저 한 번 하라’고 말한다.
물론 '절 한 번 하라' 말하기 전에 벌써 법은 환히 드러났겠으나, 아직은 알지 못한 수로 화상은 마조스님께 절을 올리다가, 마조스님께 한 번 걷어 차이고서야 마침내 이 법을 확인하게 되는 기연을 경험한다.
○
이와 같이 깨달음의 기연이란 머리로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도대체 절을 하다가 걷어차였는데 어찌 곧장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일까?
우리는 보통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 그 순간의 그 일, 그 말 한 번으로 기연을 이루었다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말과 그 일로 인해 깨닫게 된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인과법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전에 이미 오랜 기간 동안의 무수히 많고 많은 공부를 통하면서 이 공부에 대한 간절함이 쌓이고 쌓여 있을 터이나, 그 어떠어떠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깨달음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인 줄로 알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공부는 비인비과(非因非果)다.
깨달음은 언제 어떻게 정해진 방법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쌓이고 쌓여가도 답이 나오지 않아 꽉 막혀 답답할 어느 즈음에선가 문득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머리로 알려해 봐야 알 수 없다.
"내"가 뭔가를 알아내려고 노력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게 될 때, “내”가 깨닫기 위해 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그 허망한 생각이 때 쉬어질 때, 비로소 깨달음의 기연이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 공부에 “내”가 있거나 “내”가 행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
○
깨달음을 얻은 수로 화상이 좋아라하며 손뼉을 치고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한 털 끝에서 다 알아버렸다고 하니, 또 여러분들이 ‘깨달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상을 가질까 걱정이다.
깨달음은 사람마다 다 다르게 온다. 이렇게 환희심이 나서 껄껄 웃을 수도 있고, 펑펑 눈물이 날 수도 있다. 쑥 내려가는 느낌일 수도, 세상과 하나 된 느낌일 수도, 눈앞에 있는 모든 세상 사물이 사라지는 듯한 강렬한 체험을 할 수도 있지만, 또한 아무런 체험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온 건지 아닌 지도 모르게 그냥 스르르 찾아오는 수도 있다.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 공부를 해 왔던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체험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체험과 관계없이 계속 꾸준히 공부를 더 해 나가다 보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안목이 밝아지면서 이 자리가 더 확고해지게 될 것이다. 살아가면서 점점 더 밝고 밝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분별적 일들에는 어쩔 수 없이 이리 저리 휘둘리게는 되겠지만, 그러나 돌아올 법의 자리가 분명하게 확보되어 있으므로 크게 안심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곧 수행이다. 그러니 그저 꾸준히 공부하는 수행의 길을 계속 가되, 재미나게 놀이하듯 살 수 있는 것이다.
○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세를 얻게 된 70대 조연 오영수 배우의 지혜


- 삶 속에서 살면서 저절로 깨달은 살아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저절로 다 내려놓게 된다.”
- “삶을 있는 이대로 두는 것, 그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 그 동안 살면서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왔으니, 이젠 그 도움을 조금씩이라도 주 위로 회향하며 살고자 한다.
○
세상에서 위대한 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니다. 숨을 쉴 줄 알고, 눈앞을 볼 줄 알며, 목마를 때 목마른 줄을 알고, 뜨거울 때 뜨거운 줄을 아는 바로 이것... 이것이 가장 위대한 진짜가 아닌가?
○
내가 남자다, 여자다 하는 생각, 예전의 힘들었던 기억, 내가 전에 어떻게 살았다 하는 생각... 이런 모든 생각 생각들이 어디서 생겨 나오는가? 지금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한 생각도 없을 때는 내가 남자다, 여자다, 나이가 들었다, 젊다 하는 생각들이 있을까?
그 없던 한 생각이 바로 여기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 ‘여기’가 바로 수로 화상이 얘기한 한 터럭 끝이다. 여기서 나온 모든 생각에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며 우리는 ‘자기 인생’을 만들어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인생 속 일들은 모두가 다 이 자리에서 나와서 이 자리로 돌아갔다. 바로 이 눈앞에서 나오고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러니 우리는 왔다 가는 그 실체 없는 허망한 일들을 두고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왔다 가든, 오면 온 줄 알고 가면 가는 줄을 밝게 아는 이 눈앞의 진리를 살아주면 된다.
어디를 가고 오더라도 모두 이 눈앞일 뿐, 우리는 어디로도 가고 온 바가 없다. 우리는 한 발도 움직인 바 없이 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인생 전체를 살 뿐이다.
수로 화상은 마침내 한 터럭 끝인 '이 자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마조어록≫ #2
방거사가 마조에게 물었다.
"만법에 짝이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그대가 한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 그 때 가서 말해 주겠다."
그러자 방거사가 다시 마조에게 물었다.
"본래인(本來人)을 어둡게 하지 마시고, 스님께선 눈을 높이 뜨십시오."
마조스님께서는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이에 방거사가 말했다.
"일 등가는 줄 없는 거문고를 스님만이 묘하게 잘 뜯는군요."
마조가 이번에는 곧 위를 쳐다보았다.
방거사가 이에 절을 하니, 마조는 방장실로 돌아갔다.
방거사가 마조 뒤를 따라 들어와서는 말했다.
"아까는 잔꾀를 부리다가 도리어 어설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물은 근육도 없고 뼈도 없으나, 능히 만 섬을 실은 배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이치는 어떻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여기에는 물도 없고 배도 없는데, 무슨 근육과 뼈를 말하는가?"
[마조어록] 중에서
스님의 강설
○
방거사는 처음에 호남의 석두스님과 공부를 하였으나 나중에 강서의 마조스님을 찾아가 법을 청하게 된다.
‘만법과 짝하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은 참된 불이중도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으로, 벌써 방거사의 공부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 있었음을 보여주고는 있다 하나, 이 역시 한 생각 일으킨 분별의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 법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조스님은 곧바로 말로 답할 수 없는 이 진리의 자리를 이렇게 가리킨 것이다. "그대가 한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하고 마조가 입을 열어 한 마디 내뱉기 전 벌써 드러나는 소식이 아닌가?
이 이야기에 몰입하여 말을 따라가기 시작한다면 벌써 어긋난다. 말 속에 답이 들어있지 않다. 그렇게 풀어서 이해한들 진정한 내 살림살이가 될 리가 없다. 머리로 헤아려 답을 내려 하지 말고 그저 모를 뿐으로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버텨야 한다.
○
본래면목을 밝혀 눈을 높이 뜨라는 방거사의 재촉에도, 마조는 끌려가지 않고 도리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방거사가 생각을 일으켜 묻는 질문에 마조가 한 치도 따라감이 없으니, 마침내 방거사는 마조의 법력을 인정하며 줄 없는 거문고를 잘 뜯는 사람이 마조밖에 없음을 칭송한다. 그 칭송에도 따라감 없는 마조에게 마침내 방거사는 절을 올린다.
○
이 마음자리에는 물도 없고 배도 없는데, 어찌 근육과 뼈를 말할 것인가? 방거사가 생각을 지어 마조에게 물었던 이러한 질문들은 모두 분별 망상일 뿐이다. 이렇게 묻고 답할 것조차 없는 것이 이 자리의 일이 아닌가? 마조는 그 무엇 하나도 붙을 것이 없는 이 진리의 자리를 그대로 가리켜 보이며 방거사를 일깨워 준 것이다.
- <법상스님 법문 말씀 요약>

10월 17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39≫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아름다운 삶
≪마조어록≫ #1
홍주의 수로 화상이 처음 마조스님을 참례하고 물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분명한 뜻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절하라."
수로가 엎드려 절을 하는데, 마조가 별안간 한 번 걷어 차버렸다.
여기서 수로가 크게 깨달았다.
일어나 손뼉을 치고 "하! 하!"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 참 신통하구나, 신통해! 백천 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다만 한 털 끝에서 곧장 다 알아버렸도다!"
곧 절을 하고는 물러가 뒷날 대중들에게 말했다.
"마조스님께 한 번 발로 채인 뒤로 지금까지 웃음이 끊이질 않는구나."
[마조어록] 중에서
스님의 강설
○
먼 거리를 돌고 돌아 마조스님을 참례하러 온 수로 화상은, 어서 빨리 법을 알아보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마조스님을 뵙자마자 급히 다가가 곧장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는다. 그러자 마조는, 수로 화상의 급한 추구심을 달래고자 하며 ‘급하게 왔으니 절이나 먼저 한 번 하라’고 말한다.
물론 '절 한 번 하라' 말하기 전에 벌써 법은 환히 드러났겠으나, 아직은 알지 못한 수로 화상은 마조스님께 절을 올리다가, 마조스님께 한 번 걷어 차이고서야 마침내 이 법을 확인하게 되는 기연을 경험한다.
○
이와 같이 깨달음의 기연이란 머리로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도대체 절을 하다가 걷어차였는데 어찌 곧장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일까?
우리는 보통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 그 순간의 그 일, 그 말 한 번으로 기연을 이루었다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말과 그 일로 인해 깨닫게 된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인과법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전에 이미 오랜 기간 동안의 무수히 많고 많은 공부를 통하면서 이 공부에 대한 간절함이 쌓이고 쌓여 있을 터이나, 그 어떠어떠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깨달음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인 줄로 알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공부는 비인비과(非因非果)다.
깨달음은 언제 어떻게 정해진 방법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쌓이고 쌓여가도 답이 나오지 않아 꽉 막혀 답답할 어느 즈음에선가 문득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머리로 알려해 봐야 알 수 없다.
"내"가 뭔가를 알아내려고 노력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게 될 때, “내”가 깨닫기 위해 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그 허망한 생각이 때 쉬어질 때, 비로소 깨달음의 기연이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 공부에 “내”가 있거나 “내”가 행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
○
깨달음을 얻은 수로 화상이 좋아라하며 손뼉을 치고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한 털 끝에서 다 알아버렸다고 하니, 또 여러분들이 ‘깨달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상을 가질까 걱정이다.
깨달음은 사람마다 다 다르게 온다. 이렇게 환희심이 나서 껄껄 웃을 수도 있고, 펑펑 눈물이 날 수도 있다. 쑥 내려가는 느낌일 수도, 세상과 하나 된 느낌일 수도, 눈앞에 있는 모든 세상 사물이 사라지는 듯한 강렬한 체험을 할 수도 있지만, 또한 아무런 체험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온 건지 아닌 지도 모르게 그냥 스르르 찾아오는 수도 있다. 내가 어떠한 방식으로 공부를 해 왔던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체험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체험과 관계없이 계속 꾸준히 공부를 더 해 나가다 보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안목이 밝아지면서 이 자리가 더 확고해지게 될 것이다. 살아가면서 점점 더 밝고 밝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분별적 일들에는 어쩔 수 없이 이리 저리 휘둘리게는 되겠지만, 그러나 돌아올 법의 자리가 분명하게 확보되어 있으므로 크게 안심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곧 수행이다. 그러니 그저 꾸준히 공부하는 수행의 길을 계속 가되, 재미나게 놀이하듯 살 수 있는 것이다.
○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세를 얻게 된 70대 조연 오영수 배우의 지혜
- 삶 속에서 살면서 저절로 깨달은 살아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저절로 다 내려놓게 된다.”
- “삶을 있는 이대로 두는 것, 그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 그 동안 살면서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왔으니, 이젠 그 도움을 조금씩이라도 주 위로 회향하며 살고자 한다.
○
세상에서 위대한 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니다. 숨을 쉴 줄 알고, 눈앞을 볼 줄 알며, 목마를 때 목마른 줄을 알고, 뜨거울 때 뜨거운 줄을 아는 바로 이것... 이것이 가장 위대한 진짜가 아닌가?
○
내가 남자다, 여자다 하는 생각, 예전의 힘들었던 기억, 내가 전에 어떻게 살았다 하는 생각... 이런 모든 생각 생각들이 어디서 생겨 나오는가? 지금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한 생각도 없을 때는 내가 남자다, 여자다, 나이가 들었다, 젊다 하는 생각들이 있을까?
그 없던 한 생각이 바로 여기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 ‘여기’가 바로 수로 화상이 얘기한 한 터럭 끝이다. 여기서 나온 모든 생각에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며 우리는 ‘자기 인생’을 만들어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인생 속 일들은 모두가 다 이 자리에서 나와서 이 자리로 돌아갔다. 바로 이 눈앞에서 나오고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러니 우리는 왔다 가는 그 실체 없는 허망한 일들을 두고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왔다 가든, 오면 온 줄 알고 가면 가는 줄을 밝게 아는 이 눈앞의 진리를 살아주면 된다.
어디를 가고 오더라도 모두 이 눈앞일 뿐, 우리는 어디로도 가고 온 바가 없다. 우리는 한 발도 움직인 바 없이 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인생 전체를 살 뿐이다.
수로 화상은 마침내 한 터럭 끝인 '이 자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마조어록≫ #2
방거사가 마조에게 물었다.
"만법에 짝이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그대가 한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 그 때 가서 말해 주겠다."
그러자 방거사가 다시 마조에게 물었다.
"본래인(本來人)을 어둡게 하지 마시고, 스님께선 눈을 높이 뜨십시오."
마조스님께서는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이에 방거사가 말했다.
"일 등가는 줄 없는 거문고를 스님만이 묘하게 잘 뜯는군요."
마조가 이번에는 곧 위를 쳐다보았다.
방거사가 이에 절을 하니, 마조는 방장실로 돌아갔다.
방거사가 마조 뒤를 따라 들어와서는 말했다.
"아까는 잔꾀를 부리다가 도리어 어설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물은 근육도 없고 뼈도 없으나, 능히 만 섬을 실은 배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이치는 어떻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여기에는 물도 없고 배도 없는데, 무슨 근육과 뼈를 말하는가?"
[마조어록] 중에서
스님의 강설
○
방거사는 처음에 호남의 석두스님과 공부를 하였으나 나중에 강서의 마조스님을 찾아가 법을 청하게 된다.
‘만법과 짝하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은 참된 불이중도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으로, 벌써 방거사의 공부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 있었음을 보여주고는 있다 하나, 이 역시 한 생각 일으킨 분별의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 법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조스님은 곧바로 말로 답할 수 없는 이 진리의 자리를 이렇게 가리킨 것이다. "그대가 한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하고 마조가 입을 열어 한 마디 내뱉기 전 벌써 드러나는 소식이 아닌가?
이 이야기에 몰입하여 말을 따라가기 시작한다면 벌써 어긋난다. 말 속에 답이 들어있지 않다. 그렇게 풀어서 이해한들 진정한 내 살림살이가 될 리가 없다. 머리로 헤아려 답을 내려 하지 말고 그저 모를 뿐으로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버텨야 한다.
○
본래면목을 밝혀 눈을 높이 뜨라는 방거사의 재촉에도, 마조는 끌려가지 않고 도리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방거사가 생각을 일으켜 묻는 질문에 마조가 한 치도 따라감이 없으니, 마침내 방거사는 마조의 법력을 인정하며 줄 없는 거문고를 잘 뜯는 사람이 마조밖에 없음을 칭송한다. 그 칭송에도 따라감 없는 마조에게 마침내 방거사는 절을 올린다.
○
이 마음자리에는 물도 없고 배도 없는데, 어찌 근육과 뼈를 말할 것인가? 방거사가 생각을 지어 마조에게 물었던 이러한 질문들은 모두 분별 망상일 뿐이다. 이렇게 묻고 답할 것조차 없는 것이 이 자리의 일이 아닌가? 마조는 그 무엇 하나도 붙을 것이 없는 이 진리의 자리를 그대로 가리켜 보이며 방거사를 일깨워 준 것이다.
- <법상스님 법문 말씀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