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4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42≫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생각 없이 내맡길까?
#1
내가 만든 병이니 내가 낫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두 믿고 생각없이 내맡겨야 할까?
우리는 이 두 마음이 다른 마음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이것이 다르지 않다. 진여심과 생멸심이 다른 두 마음이 아닌 것처럼, 다 같은 말이다.
마음을 내서 병을 낫게 하고자 노력도 해야 하되, 함없이 하는 것이 곧 내맡기는 마음이다.
다만 내가 어떻게 병을 다루어야 할까? 이 몸도 병도 실체가 아니라 모두 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므로 근원에서는 완전 내맡기되, 현실에서는 중생심을 적절히 써서 낫고자 하는 마음을 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마음을 내면, 모두 내맡기면 다 이룰 수 있을거야, 병이 나을 수 있을거야!' 하는 집착을 먼저 놓아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내맡김이 아니다.
완전히 내맡기되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한다 함은 근본 지혜에 눈을 뜨고 분별심을 모두 내려놓음을 뜻한다.
나아지고자 하는 노력은 다 하지만, 본래의 나는 아파도 아픈 바가 없고, 아픈 내가 없음을 아는 지혜에 눈을 뜰 때, 곧장 모두 내맡기고 살 수 있다. 아픔을 그대로 허용할 수 있게 된다.
즉 근원의 자리에 눈을 뜨고 굳건히 뿌리 내린채, 현실에서의 삶에서는 무슨 일이든 하되 함 없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되 함없이 모든 일을 다 하며 온전히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살아주며 아파할 때, 그러할 때 비로소 그 아픔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겪어주며 해소해 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2
≪마조어록42≫
○
스님께서 한 스님을 시켜 경산 법흠스님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속에는 일원상이 그려져 있었다. 경산스님은 뜯자마자 붓을 찾아 가운데 한 점을 찍었다.
그 뒤 어떤 스님이 혜충국사에게 이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국사는 말했다.
"법흠스님이 오히려 마조대사에게 속았구나."
스님의 강설
우리 공부인들은 이러한 선어록의 일화들을 보면서, 이럴 때는 어찌 답을 해야 할 것인가, 누가 옳고 누가 잘못 답한 것이가, 법은 어떻게 표현해야 옳은 것인가... 하며 무슨 이야기인지를 생각하며 이해하려 애쓸 것이 없다.
옛날 당나라 때 마조스님과 경산스님과 혜충국사의 에피소드라고 생각하며 이 어록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지만, 실은 지금 이 이야기들이 어디서 펼쳐지고 있는가? 지금 이 자리가 아닌가? 다시 지금 이 자리로 딱 돌아오면 여기서 무슨 일이 있는가? 아무일이 없다.
이 이야기에 속고 마조에게 경산에게 속아서는 안된다. 법이라는 것은 '이것이다' 하고 세울 수가 없다.
경산스님이 마조스님이 보낸 일원상에 점 하나를 더 찍으며 생각으로 답을 찾으려고 그 생각 속으로 뛰어들어 또 다른 분별을 더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이야기를 따라가며 생각과 분별을 더한다면, 그것은 법에서 한참 멀어지는 일이다.
이 선어록에 나오는 일화들은 모두 제자들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선사들의 임시방편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본래 있지도 않은 문제를 스스로 생각 속에서 만들고 자승자박한 제자들을 풀어주기 위한 방편들은 그 때 그 때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문제들이 실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곧장 지금 여기 눈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지금 여기에 무슨 일이 있는가?
단지 이것 뿐이지 않은가?
이렇게 눈앞으로 돌아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
한 강사가 찾아와서 물었다.
"선종에서는 어떤 법을 전수합니까?"
스님께서 되물었다.
"강사는 어떤 법을 전해주는가?"
"외람되게도 20여본의 경론을 강의합니다."
"그렇다면 사자가 아닌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스님께서 "허허!"하고 소리를 내자 강사가 말했다.
"이것이 법이군요."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스님께서 잠자코 있자 강사가 말했다.
"이것도 법이군요"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 속에 있는 법입니다."
"나오지도 않고 들어앉지도 않는 것은 무슨 법인가?"
강사는 대꾸가 없었다. 드디어 하직을 하고 문을 나오는데 스님께서 "좌주여!" 하고 불렀다.
강사가 머리를 돌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게 무엇인가?"
강사가 역시 대꾸가 없자, 스님께서는
"이 둔한 중아!" 하셨다.
스님의 강설
이 강사는 경전과 논서를 합쳐 20여권을 다 강의할 줄 안다고 자랑하며 마조스님을 찾아갔지만 결국은 마조의 물음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채 돌아나오며 둔한 중이라는 부름을 듣고 만다.
이렇게 뭔가를 아는 척하고 머리로 이것이 법이다, 저것이 법이다 하며 규정하려 한다면 이미 법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진 것이다.
그저 꽉 막혀 모를 뿐으로 있으면 그 뿐, 자꾸 선명하게 알고자 머리를 굴려가며 알음알이를 늘여가봤자 모두 헛일이다.
머리를 굴리지 않고, 다만 가슴으로 답답함을 품고 꽉 막혀 있을 것! 그것이 진정 제대로 공부해 나가는 방법 아닌 방법일 것이다.

○
홍주 염사가 물었다.
"술과 고기를 먹어야 옳습니까, 먹지 않아야 옳습니까?"
"먹는 것은 그대의 국록이며, 먹지 않는 것은 그대의 불복입니다."
스님의 강설
홍주에 사는 한 재가 불자 관리인 염사가 마조에게 술과 고기를 먹는 게 옳은지, 먹지 않는 게 옳은지 묻고 있다.
마조는 먹는다면 나라의 녹을 받는 그대의 복이고, 먹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불가에서는 음주와 육식을 금하고 있다고 상식적으로들 생각하시지만, 실은 어떠한가? 불교에는 그 어떠한 것도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거나 하는 것은 없다. 절대 옳고 절대 그른 것이 있다면 이미 진리를 벗어난 것이다. 절대 진리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불교에서는 계율은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계율을 지킴에 있어서도 열고 닫음이 있으니 이를 개차법이라 하는 것이다.
지킬 줄도 알아야 하지만 범할 줄도 알아야 하며, 그 어느 계율에도 집착함이 없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불교의 법이다. 절대선도 없고 절대악도 없으니 그것이 진정한 불교적 지혜이다.
절집안에서는 모든 방편이 두루 쓰일 수 있다. 어떠한 방편으로든 우선 괴로움에 처한 중생들의 마음을 달래고 편하게 해줄 수 있다면 요긴하게 쓰일 것이며, 이 후에 본격적으로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길이 되어 줄 방편들이 지금도 두루 많이 쓰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방편들은 필요할 때 임시로 잘 세워 쓰되 궁극에는 무너뜨림에도 자재하게 쓴다면, 효용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도 허락되지 않으나, 사사롭게는 수레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것이 곧 불법인 것이다.
관불용침 사통거마(官不容針 私通車馬)!
공부인이라면 어떤 것에 절대 옳음이나 절대 그름을 내세우며 법상을 쥐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분별을 두지 않는 것, 무엇이든 하되 함이 없이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불이중도의 법이다.

11월 14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42≫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생각 없이 내맡길까?
#1
내가 만든 병이니 내가 낫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두 믿고 생각없이 내맡겨야 할까?
우리는 이 두 마음이 다른 마음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이것이 다르지 않다. 진여심과 생멸심이 다른 두 마음이 아닌 것처럼, 다 같은 말이다.
마음을 내서 병을 낫게 하고자 노력도 해야 하되, 함없이 하는 것이 곧 내맡기는 마음이다.
다만 내가 어떻게 병을 다루어야 할까? 이 몸도 병도 실체가 아니라 모두 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므로 근원에서는 완전 내맡기되, 현실에서는 중생심을 적절히 써서 낫고자 하는 마음을 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마음을 내면, 모두 내맡기면 다 이룰 수 있을거야, 병이 나을 수 있을거야!' 하는 집착을 먼저 놓아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내맡김이 아니다.
완전히 내맡기되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한다 함은 근본 지혜에 눈을 뜨고 분별심을 모두 내려놓음을 뜻한다.
나아지고자 하는 노력은 다 하지만, 본래의 나는 아파도 아픈 바가 없고, 아픈 내가 없음을 아는 지혜에 눈을 뜰 때, 곧장 모두 내맡기고 살 수 있다. 아픔을 그대로 허용할 수 있게 된다.
즉 근원의 자리에 눈을 뜨고 굳건히 뿌리 내린채, 현실에서의 삶에서는 무슨 일이든 하되 함 없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되 함없이 모든 일을 다 하며 온전히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살아주며 아파할 때, 그러할 때 비로소 그 아픔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겪어주며 해소해 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2
≪마조어록42≫
○
스님께서 한 스님을 시켜 경산 법흠스님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속에는 일원상이 그려져 있었다. 경산스님은 뜯자마자 붓을 찾아 가운데 한 점을 찍었다.
그 뒤 어떤 스님이 혜충국사에게 이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국사는 말했다.
"법흠스님이 오히려 마조대사에게 속았구나."
스님의 강설
우리 공부인들은 이러한 선어록의 일화들을 보면서, 이럴 때는 어찌 답을 해야 할 것인가, 누가 옳고 누가 잘못 답한 것이가, 법은 어떻게 표현해야 옳은 것인가... 하며 무슨 이야기인지를 생각하며 이해하려 애쓸 것이 없다.
옛날 당나라 때 마조스님과 경산스님과 혜충국사의 에피소드라고 생각하며 이 어록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지만, 실은 지금 이 이야기들이 어디서 펼쳐지고 있는가? 지금 이 자리가 아닌가? 다시 지금 이 자리로 딱 돌아오면 여기서 무슨 일이 있는가? 아무일이 없다.
이 이야기에 속고 마조에게 경산에게 속아서는 안된다. 법이라는 것은 '이것이다' 하고 세울 수가 없다.
경산스님이 마조스님이 보낸 일원상에 점 하나를 더 찍으며 생각으로 답을 찾으려고 그 생각 속으로 뛰어들어 또 다른 분별을 더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이야기를 따라가며 생각과 분별을 더한다면, 그것은 법에서 한참 멀어지는 일이다.
이 선어록에 나오는 일화들은 모두 제자들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선사들의 임시방편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본래 있지도 않은 문제를 스스로 생각 속에서 만들고 자승자박한 제자들을 풀어주기 위한 방편들은 그 때 그 때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문제들이 실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곧장 지금 여기 눈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지금 여기에 무슨 일이 있는가?
단지 이것 뿐이지 않은가?
이렇게 눈앞으로 돌아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
한 강사가 찾아와서 물었다.
"선종에서는 어떤 법을 전수합니까?"
스님께서 되물었다.
"강사는 어떤 법을 전해주는가?"
"외람되게도 20여본의 경론을 강의합니다."
"그렇다면 사자가 아닌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스님께서 "허허!"하고 소리를 내자 강사가 말했다.
"이것이 법이군요."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스님께서 잠자코 있자 강사가 말했다.
"이것도 법이군요"
"무슨 법인가"
"사자가 굴 속에 있는 법입니다."
"나오지도 않고 들어앉지도 않는 것은 무슨 법인가?"
강사는 대꾸가 없었다. 드디어 하직을 하고 문을 나오는데 스님께서 "좌주여!" 하고 불렀다.
강사가 머리를 돌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게 무엇인가?"
강사가 역시 대꾸가 없자, 스님께서는
"이 둔한 중아!" 하셨다.
스님의 강설
이 강사는 경전과 논서를 합쳐 20여권을 다 강의할 줄 안다고 자랑하며 마조스님을 찾아갔지만 결국은 마조의 물음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채 돌아나오며 둔한 중이라는 부름을 듣고 만다.
이렇게 뭔가를 아는 척하고 머리로 이것이 법이다, 저것이 법이다 하며 규정하려 한다면 이미 법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진 것이다.
그저 꽉 막혀 모를 뿐으로 있으면 그 뿐, 자꾸 선명하게 알고자 머리를 굴려가며 알음알이를 늘여가봤자 모두 헛일이다.
머리를 굴리지 않고, 다만 가슴으로 답답함을 품고 꽉 막혀 있을 것! 그것이 진정 제대로 공부해 나가는 방법 아닌 방법일 것이다.
○
홍주 염사가 물었다.
"술과 고기를 먹어야 옳습니까, 먹지 않아야 옳습니까?"
"먹는 것은 그대의 국록이며, 먹지 않는 것은 그대의 불복입니다."
스님의 강설
홍주에 사는 한 재가 불자 관리인 염사가 마조에게 술과 고기를 먹는 게 옳은지, 먹지 않는 게 옳은지 묻고 있다.
마조는 먹는다면 나라의 녹을 받는 그대의 복이고, 먹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물론 불가에서는 음주와 육식을 금하고 있다고 상식적으로들 생각하시지만, 실은 어떠한가? 불교에는 그 어떠한 것도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거나 하는 것은 없다. 절대 옳고 절대 그른 것이 있다면 이미 진리를 벗어난 것이다. 절대 진리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불교에서는 계율은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계율을 지킴에 있어서도 열고 닫음이 있으니 이를 개차법이라 하는 것이다.
지킬 줄도 알아야 하지만 범할 줄도 알아야 하며, 그 어느 계율에도 집착함이 없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불교의 법이다. 절대선도 없고 절대악도 없으니 그것이 진정한 불교적 지혜이다.
절집안에서는 모든 방편이 두루 쓰일 수 있다. 어떠한 방편으로든 우선 괴로움에 처한 중생들의 마음을 달래고 편하게 해줄 수 있다면 요긴하게 쓰일 것이며, 이 후에 본격적으로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길이 되어 줄 방편들이 지금도 두루 많이 쓰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방편들은 필요할 때 임시로 잘 세워 쓰되 궁극에는 무너뜨림에도 자재하게 쓴다면, 효용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도 허락되지 않으나, 사사롭게는 수레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것이 곧 불법인 것이다.
관불용침 사통거마(官不容針 私通車馬)!
공부인이라면 어떤 것에 절대 옳음이나 절대 그름을 내세우며 법상을 쥐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분별을 두지 않는 것, 무엇이든 하되 함이 없이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불이중도의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