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어른동화)

Kim Simon
2021-11-10
조회수 1109

동네 어귀에 임시보건진료소가 차려졌습니다.
가끔 여름이 되면 대처에서 공부하는 의대생들이 근동의 마을에 임시보건진료소를 차리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곤 했는데 올해는 마침 분이가 사는 동네 어귀에 그 보건진료소가 차려진 것입니다.

분이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랫집 송이의 손을 잡고 그 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마침 안과도 진료과목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순서가 되어서 송이가 이끄는 대로 학생의사 앞에 앉았습니다.

"환자 성함은요?"
"이분이 입니다."
잠시 이름을 적는 듯 뜸을 들인 의사가 다시 묻습니다.
"어디가 아프신가요?"
"눈이 안 보여요."
"제가 좀 살펴볼게요."
분이의 눈을 열어보고 세심하게 살펴보는 의사의 손길이 분이에게는 참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언제부터 눈이 안 보였나요?"
"여덟 살 학교 갈 무렵부터요...조금씩 앞이 희미하게 보이더니 어느 날부터는 전혀 앞이 안보였어요."
"네..."
다시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로 꼼꼼하게 분이의 눈을 살펴보며 뭔가를 기록하던 그 학생의사가 진찰을 끝내고 말했습니다.
"저...죄송한데요. 제가 아직 학생이라 눈에 염증이 생긴 정도는 금방 치료해 드릴 수가 있는데 분이씨의 눈을 치료할 실력은 못 되요. 나중에 제가 분이씨 눈을 낫게 해줄 실력을 쌓으면 꼭 다시 연락 드릴게요."
"네..."
별반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대답하는 분이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습니다.
"눈이 안보이니 손 감각은 더 예민하시죠? 약속의 의미로 손도장을 찍을까요?"
학생 의사는 분이의 눈을 더듬던 그 부드럽고 따뜻한 손으로 분이의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꾹 눌러 찍었습니다. 손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 분이는 손과 엄지의 그 감각을 마음에 새기면서 환하게 웃어 주었습니다. 물론 그 목소리도 함께 마음에 새겼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분이는 옛 생각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습니다.
소꿉친구 용이.
용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서 살던 친구였습니다. 부모님들이 논과 밭으로 일을 나가면 용이와 분이는 늘 소꿉놀이를 했었습니다. 

용이는 아빠. 분이는 엄마. 동네에 또래 친구들이 없다보니 늘 둘이서만 놀게 되었죠.
하루는 둘이서 같이 놀다가 그만 분이가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났습니다.
"내가 호~ 해주면 나을 거야."
열심히 분이 무릎에 호~를 해대는 용이를 보다가 그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서 분이는 그만 아픔도 잊고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분이를 쳐다보며 함께 깔깔대며 웃던 용이가 갑자기 손을 쑥 내밀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크면 정말로 나는 아빠가 되고 너는 엄마가 되자."
"그래~ 너는 아빠 나는 엄마. 헤헤"
서로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손도장을 찍던 그날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 후 용이 아버지는 큰 병이 걸려 그만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 용이 어머니도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가 용이와 분이가 막 여덟 살이 되던 그 무렵이었습니다.
용이가 낯선 친척의 손에 이끌려 마을을 떠나던 날 분이는 아주 많이 울었습니다.

용이와 헤어져서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분이는 울지 않고서는 그 슬픔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손을 흔들며 멀어져가던 용이가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희미하게 들려 왔습니다.
"약..속...잊....지.....마......."
그날 이후 밥 먹으면서도 혼자 놀면서도 잠들 때도 늘 울며 지내던 분이는 눈앞이 조금씩 희미하게 보이더니 어느 날부터는 전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앞이 안 보이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임시보건진료소에서 진료를 받은 후 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서른 살을 넘기고도 몇 살을 더 먹은 분이는 노처녀 시각장애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가까운 읍내에 안과의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후 그 안과의원 원장이 분이를 의원으로 초대했습니다.

"혹시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아...그 목소리. 분명 그 학생의사의 목소리였습니다.
분이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는 그 의사는 분이의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에 손도장을 찍었습니다.
"이제 제가 분이씨 눈을 치료해줄 수 있어요."

붕대를 푸는 날. 분이는 안절부절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의사가 다가와 붕대를 풀려는 순간, 분이는 떨리는 손으로 그 의사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이 붕대를 풀면 정말 제가 앞을 볼 수 있나요?"
"두렵고 떨리세요?"
"네..."
"절 믿으시죠?"
"네...그래도 떨려요..."
그때 의사가 분이의 귀에 입을 대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내가 호~해주면 나을 거야...나는 아빠 너는 엄마..."

눈을 뜬 분이 앞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용이가 어릴 적 그대로의 환한 웃음을 웃으며 서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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