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색은요?"
"음...하늘색은...꿈과 아픔을 받아주는 색 같은 거야."
"꿈과 아픔을...?"
"응. 꿈은 이루어주고 아픔은 씻어주는...그런 색..."
뭔가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현수가 귀여워 보였다.
"현수도 마음속에 바라는 꿈들이 있지?"
"네~" 삶은 계란 같은 볼에 앙증맞은 볼우물을 만들며 현수가 웃었다.
"하나 가르쳐 줄래?"
"헤헤." 또 웃는다. 볼우물 주위가 발개진다.
"왜 웃어? 가르쳐 달라니까~ 비밀이야?" 서운한 듯 약간 톤을 높여 물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괸 현수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이더니 오른손 검지를 입 앞에 조심스레 세운다.
"쉿...아빠한테는 비밀이예요."
"응~ 뭐야?" 현수 입 앞에 바싹 귀를 들이대었다.
현수 입가에 부끄러운 웃음이 맺히더니,
"나도...엄마가..."
저와 나 둘밖에 없는데도 혹 누가 들을까봐 아주 낮게 말한다.
"응~"
"있었으면 좋겠어요. 헤헤. 쉬....잇..."
"쉬...잇...그래 비밀 꼭 지킬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현수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작은 손을 잡고 손도장을 찍는데, 가슴 어디선가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며칠 전 현수를 처음 만난 그날이 떠올랐다.
국전에 몇 번에 걸쳐 도전했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실의에 빠져 또다시 몇 년의 나날들을 허송세월로 보내다가 보니 어느새 여자 나이 서른넷이 되어버렸다. 급기야 늦은 결혼을 서두르는 부모님의 성화를 피하고자 미술입시학원 문을 열었었다. 대학시절부터 졸업 후까지 큰 미술대전에서의 여러 입상경력들이 알려졌는지 입시를 앞둔 학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국전에 대한 미련을 접고, 학생들의 입시지도에 열심히 매달린 결과 이제 인근에서는 제법 유명한 명문 입시 대비 미술학원으로 이름을 날리게까지 되었다.
며칠 전의 늦은 오후, 학원 문으로 그들이 손을 꼭 잡은 채 들어섰다. 현수와 현수 아빠.
눈에 초점이 없고 동공이 풀린 현수는 첫눈에 바로 시각장애인임을 알 수 있었다.
"현수가 그림을 그리고 싶데요..."
상담테이블에 앉자마자 첫마디 말을 조심스레 꺼낸 현수 아빠는 홀아비임을 광고라도 하듯, 오래 세탁하지 않은 양복에 유행이 한참 지난 폭 좁은 넥타이를 왼쪽으로 약간 돌아가게 매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이 그림을...??....."
문득 내뱉다가 아차 싶어 살펴보니 현수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말이 없고, 현수 아빠의 얼굴에는 드러난 체념 속에 간절함이 숨어 있었다.
"제가 시각장애인을 지도한 경험이 없어서 어려울 것 같군요..."
경험한 적은 없었지만 냉정하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런 경우 괜한 기대감을 심어주었다가 나중에 일이 더 어렵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난...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선생님..."
어색한 침묵이 낮게 내려앉을 즈음, 현수가 여섯살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또박또박하게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아이들이 다니는 미술학원에...갔어요. 친구들이 많아서...좋았어요."
현수를 보니 현수의 얼굴이 나를 향해 있었다. 분명히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은 눈인데, 마치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이...놀렸어요. 봉사라고...나는 친구들과...사이좋게 놀며...그림 그리고 싶었는데..."
"봉사가...무슨 그림을 그리느냐고...놀리고...밀치고...때리고...."
현수 아빠는 이제 당신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듯 내 쪽은 외면한 채, 손수건을 꺼내 소리 없이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선생님은...좋은 선생님일 거라고...아빠가 말했어요."
나는 이제 현수의 말을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현수의 다음 말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걸...사랑해서...그림 그리고 싶어하는 형아들...누나들...잘 도와 주신다고요..."
"여기는...놀리고...때리는...아이들도 없고...형아와 누나들이...잘 대해 줄 거라고요..."
현수 아빠가 슬그머니 일어서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우리 아빠 울죠?" 나지막한 목소리로 현수가 물었다.
"아니...왜?"
"코 풀러 나가신 거예요. 헤~"
마침 학원 문 앞 복도에서 현수 아빠의 소리 죽여 코푸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현수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내 쪽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응...?"
그 작고 앙증맞은 손을 잡았다. 현수가 한 손을 빼내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나...그림...그리고 싶어요. 도와주실 거죠?"
"그래...그럴게..."
왠지 그 말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며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날 나는 일찍 잠들 수가 없었다.
'어떻게 현수에게 그림을 가르칠까...?'
'눈이 안 보이는 아이에게 어떻게 색을 가르치지...?'
'괜한 짓을 한 거야...내일 만나면 못하겠다고 말해 버릴까...?'
'아니야...어떻게 그래...그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데...얼마나 떨리고 있었는데...'
생각에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때 문득 얼마 전에 작고하신 스승님과 오래 전에 나누었던 짤막한 대화가 떠올랐다.
"그림을 그릴 때는...먼저 그 대상과 나를 하나로 만들어야 돼. 어떤 구도도 어떤 색도 미리 머리 속에 떠올리지 말고...그 대상과 내 마음을 하나로 합치는 거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어요?"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어. 그런 상태가 되면 붓이 저절로 내 마음을 따라 움직여가니까..."
"........................" 알 듯 말 듯, 애매모호한 말씀이셨다.
"그림은 붓으로 그리는 게 아냐...마음으로 그리는 거야..."
어쩌면 현수를 가르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그 다음날 학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는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근원은 학원 벽면에 높다랗게 걸린 풍경화 한 점 때문이었다. 국전 심사위원들을 비웃을 정도로 내 상처 난 자존심을 충분히 보상해주던 그림이었는데 오늘따라 자꾸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닌 듯 낯설게만 느껴졌다. 심지어 그 작품을 그곳에 걸어 두었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여서, 학생들이 오기 전에 얼른 내려 뒤쪽에다 감추어 버렸다.
첫날 현수와의 그림 수업이 시작되었다.
늦은 오후, 아빠의 손을 잡고 들어선 현수의 얼굴은 새로운 기대감으로 빛이 나는 듯 보였다.
"검은색은 어떤 색이예요?"
아직 캔버스가 필요 없는 현수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귀를 쫑긋 세웠다.
"현수는 어떤 색이 보여?"
"깜깜해요. 아무 색도 안 보여요."
"그 색이야 바로..."
"그럼 무섭고 두려운 색?"
나도 눈을 감았다. 망막에 검고 어두운 색이 가득 채워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기다리니 어떤 느낌이 우러나 말이 되어 흘러 나왔다.
"아니...모든 색을 품은 시작의 색이야. 모든 색은 검은색에서부터 나온단다..."
"그러면...무서운 색이 아니라 마음이 설레는 색이네요? 전 오늘도 설레면서 왔거든요. 헤~"
"그래 맞아. 마음이 설레는 색. 무슨 색이 나올까...궁금하게 만드는 색. 야~ 현수 대단한데~"
"헤~~" 눈을 떠보니 현수가 볼우물을 파며 맑게 웃고 있었다.
"하얀색은요?"
다신 눈을 감고 머리 속을 하얀색으로 가득 채웠다.
"검은 색이 처음 만든 색. 모든 색의 바탕 색. 색들은 하얀색 위에서 비로소 춤출 수 있단다."
"그럼...부처님 같은 색? 헤~"
"맞아~ 와우~ 현수 정말 대단하네~"
"헤~~" 현수를 안아주고 싶었다. 현수 등뒤로 가서 가만히 현수를 안으니 현수도 기분이 좋은지 가만히 있었다.
"선생님."
"응?"
"지금 이 느낌은 무슨 색?"
"느낌이 어떤데...?"
"따뜻해요...행복해요...오래 이렇게 있고 싶어요..."
"아마도 연한 분홍색일걸?"
그렇게 시작한 색 공부이자 그림 공부였다.
노란색은 삐약삐약 병아리 웃음소리 같은 색도 되고, 나비 날개 짓 소리도 되고...
보라색은 숨겨둔 비밀 같은 색이 되었다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함 같은 색도 되고...
파란색은 바람 소리 같은 색이다가, 아침 찬물에 손 담글 때의 느낌 같은 색도 되고...
빨간색은 쿵쿵 심장 뛰는 소리 같은 색이다가...
초록색은 봄 풀에서 나는 향기 같은 색이다가...
갈색은 화난 아빠 음성 같은 색이다가......
녹색은 개구리 울음소리 같은 색이다가, 산에서 나는 향기 같은 색도 되고...
현수를 통해 날마다 새롭게 살아난 색들에게서는 향기와 소리가 났다. 현수를 가르치다보니 내 의식 속에 오래도록 갇혀 있던 색들도 어느새 하나하나 자유로운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내가 현수를 가르친 게 아니라 현수가 나를 가르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느 날 나에게로 날아 온 천사. 현수를 바라보니 한창 엄마 얼굴을 그린다고 열중하고 있었다.
그 순간, 착시였을까?
현수의 어깨 위로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은빛으로 너무나 밝게 빛나는 날개가 조금씩 돋아나고 있는 게 보였다. 거부할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혀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 빛이 점차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내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니 그 빛이 내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내 몸과 마음이 그 빛에 녹아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려움이 아닌 울림이 큰 기쁨처럼...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으로...
의식 없이 캔바스로 걸어갔고 손이 붓을 들었다.
"선생님~ 선생님~"
현수가 부르는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어 의식을 차려보니, 내 캔버스에는 아주 친숙한 느낌이 드는 작품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 작품 속에는 은빛 날개를 얌전히 접은 채, 기도를 하는 지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쥔 아기천사 하나 빛나고 있었다.
지금 풍경화 그림을 떼어낸 그 자리에는 내가 아기천사라 이름 붙인 그 그림과 현수가 그린 엄마 그림이 사이좋게 나란히 걸려있다.
"하늘색은요?"
"음...하늘색은...꿈과 아픔을 받아주는 색 같은 거야."
"꿈과 아픔을...?"
"응. 꿈은 이루어주고 아픔은 씻어주는...그런 색..."
뭔가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현수가 귀여워 보였다.
"현수도 마음속에 바라는 꿈들이 있지?"
"네~" 삶은 계란 같은 볼에 앙증맞은 볼우물을 만들며 현수가 웃었다.
"하나 가르쳐 줄래?"
"헤헤." 또 웃는다. 볼우물 주위가 발개진다.
"왜 웃어? 가르쳐 달라니까~ 비밀이야?" 서운한 듯 약간 톤을 높여 물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괸 현수는 약간 망설이는 표정이더니 오른손 검지를 입 앞에 조심스레 세운다.
"쉿...아빠한테는 비밀이예요."
"응~ 뭐야?" 현수 입 앞에 바싹 귀를 들이대었다.
현수 입가에 부끄러운 웃음이 맺히더니,
"나도...엄마가..."
저와 나 둘밖에 없는데도 혹 누가 들을까봐 아주 낮게 말한다.
"응~"
"있었으면 좋겠어요. 헤헤. 쉬....잇..."
"쉬...잇...그래 비밀 꼭 지킬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현수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작은 손을 잡고 손도장을 찍는데, 가슴 어디선가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며칠 전 현수를 처음 만난 그날이 떠올랐다.
국전에 몇 번에 걸쳐 도전했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실의에 빠져 또다시 몇 년의 나날들을 허송세월로 보내다가 보니 어느새 여자 나이 서른넷이 되어버렸다. 급기야 늦은 결혼을 서두르는 부모님의 성화를 피하고자 미술입시학원 문을 열었었다. 대학시절부터 졸업 후까지 큰 미술대전에서의 여러 입상경력들이 알려졌는지 입시를 앞둔 학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국전에 대한 미련을 접고, 학생들의 입시지도에 열심히 매달린 결과 이제 인근에서는 제법 유명한 명문 입시 대비 미술학원으로 이름을 날리게까지 되었다.
며칠 전의 늦은 오후, 학원 문으로 그들이 손을 꼭 잡은 채 들어섰다. 현수와 현수 아빠.
눈에 초점이 없고 동공이 풀린 현수는 첫눈에 바로 시각장애인임을 알 수 있었다.
"현수가 그림을 그리고 싶데요..."
상담테이블에 앉자마자 첫마디 말을 조심스레 꺼낸 현수 아빠는 홀아비임을 광고라도 하듯, 오래 세탁하지 않은 양복에 유행이 한참 지난 폭 좁은 넥타이를 왼쪽으로 약간 돌아가게 매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이 그림을...??....."
문득 내뱉다가 아차 싶어 살펴보니 현수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말이 없고, 현수 아빠의 얼굴에는 드러난 체념 속에 간절함이 숨어 있었다.
"제가 시각장애인을 지도한 경험이 없어서 어려울 것 같군요..."
경험한 적은 없었지만 냉정하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런 경우 괜한 기대감을 심어주었다가 나중에 일이 더 어렵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난...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선생님..."
어색한 침묵이 낮게 내려앉을 즈음, 현수가 여섯살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또박또박하게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아이들이 다니는 미술학원에...갔어요. 친구들이 많아서...좋았어요."
현수를 보니 현수의 얼굴이 나를 향해 있었다. 분명히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은 눈인데, 마치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이...놀렸어요. 봉사라고...나는 친구들과...사이좋게 놀며...그림 그리고 싶었는데..."
"봉사가...무슨 그림을 그리느냐고...놀리고...밀치고...때리고...."
현수 아빠는 이제 당신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듯 내 쪽은 외면한 채, 손수건을 꺼내 소리 없이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선생님은...좋은 선생님일 거라고...아빠가 말했어요."
나는 이제 현수의 말을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현수의 다음 말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걸...사랑해서...그림 그리고 싶어하는 형아들...누나들...잘 도와 주신다고요..."
"여기는...놀리고...때리는...아이들도 없고...형아와 누나들이...잘 대해 줄 거라고요..."
현수 아빠가 슬그머니 일어서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우리 아빠 울죠?" 나지막한 목소리로 현수가 물었다.
"아니...왜?"
"코 풀러 나가신 거예요. 헤~"
마침 학원 문 앞 복도에서 현수 아빠의 소리 죽여 코푸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현수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내 쪽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응...?"
그 작고 앙증맞은 손을 잡았다. 현수가 한 손을 빼내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나...그림...그리고 싶어요. 도와주실 거죠?"
"그래...그럴게..."
왠지 그 말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며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날 나는 일찍 잠들 수가 없었다.
'어떻게 현수에게 그림을 가르칠까...?'
'눈이 안 보이는 아이에게 어떻게 색을 가르치지...?'
'괜한 짓을 한 거야...내일 만나면 못하겠다고 말해 버릴까...?'
'아니야...어떻게 그래...그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데...얼마나 떨리고 있었는데...'
생각에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때 문득 얼마 전에 작고하신 스승님과 오래 전에 나누었던 짤막한 대화가 떠올랐다.
"그림을 그릴 때는...먼저 그 대상과 나를 하나로 만들어야 돼. 어떤 구도도 어떤 색도 미리 머리 속에 떠올리지 말고...그 대상과 내 마음을 하나로 합치는 거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어요?"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어. 그런 상태가 되면 붓이 저절로 내 마음을 따라 움직여가니까..."
"........................" 알 듯 말 듯, 애매모호한 말씀이셨다.
"그림은 붓으로 그리는 게 아냐...마음으로 그리는 거야..."
어쩌면 현수를 가르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그 다음날 학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는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근원은 학원 벽면에 높다랗게 걸린 풍경화 한 점 때문이었다. 국전 심사위원들을 비웃을 정도로 내 상처 난 자존심을 충분히 보상해주던 그림이었는데 오늘따라 자꾸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닌 듯 낯설게만 느껴졌다. 심지어 그 작품을 그곳에 걸어 두었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여서, 학생들이 오기 전에 얼른 내려 뒤쪽에다 감추어 버렸다.
첫날 현수와의 그림 수업이 시작되었다.
늦은 오후, 아빠의 손을 잡고 들어선 현수의 얼굴은 새로운 기대감으로 빛이 나는 듯 보였다.
"검은색은 어떤 색이예요?"
아직 캔버스가 필요 없는 현수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귀를 쫑긋 세웠다.
"현수는 어떤 색이 보여?"
"깜깜해요. 아무 색도 안 보여요."
"그 색이야 바로..."
"그럼 무섭고 두려운 색?"
나도 눈을 감았다. 망막에 검고 어두운 색이 가득 채워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기다리니 어떤 느낌이 우러나 말이 되어 흘러 나왔다.
"아니...모든 색을 품은 시작의 색이야. 모든 색은 검은색에서부터 나온단다..."
"그러면...무서운 색이 아니라 마음이 설레는 색이네요? 전 오늘도 설레면서 왔거든요. 헤~"
"그래 맞아. 마음이 설레는 색. 무슨 색이 나올까...궁금하게 만드는 색. 야~ 현수 대단한데~"
"헤~~" 눈을 떠보니 현수가 볼우물을 파며 맑게 웃고 있었다.
"하얀색은요?"
다신 눈을 감고 머리 속을 하얀색으로 가득 채웠다.
"검은 색이 처음 만든 색. 모든 색의 바탕 색. 색들은 하얀색 위에서 비로소 춤출 수 있단다."
"그럼...부처님 같은 색? 헤~"
"맞아~ 와우~ 현수 정말 대단하네~"
"헤~~" 현수를 안아주고 싶었다. 현수 등뒤로 가서 가만히 현수를 안으니 현수도 기분이 좋은지 가만히 있었다.
"선생님."
"응?"
"지금 이 느낌은 무슨 색?"
"느낌이 어떤데...?"
"따뜻해요...행복해요...오래 이렇게 있고 싶어요..."
"아마도 연한 분홍색일걸?"
그렇게 시작한 색 공부이자 그림 공부였다.
노란색은 삐약삐약 병아리 웃음소리 같은 색도 되고, 나비 날개 짓 소리도 되고...
보라색은 숨겨둔 비밀 같은 색이 되었다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함 같은 색도 되고...
파란색은 바람 소리 같은 색이다가, 아침 찬물에 손 담글 때의 느낌 같은 색도 되고...
빨간색은 쿵쿵 심장 뛰는 소리 같은 색이다가...
초록색은 봄 풀에서 나는 향기 같은 색이다가...
갈색은 화난 아빠 음성 같은 색이다가......
녹색은 개구리 울음소리 같은 색이다가, 산에서 나는 향기 같은 색도 되고...
현수를 통해 날마다 새롭게 살아난 색들에게서는 향기와 소리가 났다. 현수를 가르치다보니 내 의식 속에 오래도록 갇혀 있던 색들도 어느새 하나하나 자유로운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내가 현수를 가르친 게 아니라 현수가 나를 가르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느 날 나에게로 날아 온 천사. 현수를 바라보니 한창 엄마 얼굴을 그린다고 열중하고 있었다.
그 순간, 착시였을까?
현수의 어깨 위로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은빛으로 너무나 밝게 빛나는 날개가 조금씩 돋아나고 있는 게 보였다. 거부할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혀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 빛이 점차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내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니 그 빛이 내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내 몸과 마음이 그 빛에 녹아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려움이 아닌 울림이 큰 기쁨처럼...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으로...
의식 없이 캔바스로 걸어갔고 손이 붓을 들었다.
"선생님~ 선생님~"
현수가 부르는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어 의식을 차려보니, 내 캔버스에는 아주 친숙한 느낌이 드는 작품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그 작품 속에는 은빛 날개를 얌전히 접은 채, 기도를 하는 지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쥔 아기천사 하나 빛나고 있었다.
지금 풍경화 그림을 떼어낸 그 자리에는 내가 아기천사라 이름 붙인 그 그림과 현수가 그린 엄마 그림이 사이좋게 나란히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