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34≫ 거대한 괴로움의 틀을 깨고...
#1 깨달음이란
○
요즘이라는 시대는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한 분의 스승이 법을 전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인해 법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다보니, 이제 ‘깨달음’이라는 말조차도 거추장스러워졌다.
과거에는 깨달음이라면 부처님이나 아니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이라고만 여겼겠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점점 알아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깨달음이라는 말은 그 동안 너무 오염되어 있었다. 깨달음은 부처님 같은 분들께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상을 갖게 되면, 이 깨달음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너무 멀리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저 위에 두고 있었던 ‘깨달음의 신화’들을 이제는 우리의 곁으로 끌어내려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왔다가 가는 일이다. 건강도, 돈도, 명예도, 권력도, 사랑도, 자식도 모두 알 수 없는 중중무진의 연기관계 속에서 인연 따라 알아서 저절로 왔다 가는 것들이다. 머릿속으로 온갖 인과관계를 그리고 따져보지만, 실은 그것들은 모두 생각일 뿐, 우리가 머리로 헤아려 알 수 있는 단순한 원인과 결과대로 일들이 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들은 모두 남 탓이라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숱한 인과관계를 만들지만, 실은 내 주변의 남들에게 탓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연기법의 인연으로 나에게 온 일들이므로 모두가 자기의 일이다. 모두가 내 일이다.
그러니 내가 바뀌면 내 가까운 인연들이 다 바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움켜쥐고 있던 생각들을 다 놓아버릴 때, 그 때 우리의 삶은 원래 이럴 뿐이다. 원래 이대로인 삶이 가장 자연스러운 삶이다.
○
깨달음이란, 생각을 일으키되 그 생각이 실제가 아니며 인연 따라 왔다 가는 것임을 알아 그 한 생각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음에 눈 뜨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세상은 그저 이러할 뿐이다.
깨닫고 나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지금 이렇게 된다. 지금 이대로가 저절로 온전히 허용되어,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삶에 더 이상 시비 걸지 않게 된다.
그럼 무엇이 깨달음인가? 지금 우리는 모두 깨달아 있다. 그러나 생각이 그 진리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 생각만 쥐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바로 자연스럽게 그냥 이대로 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2 진짜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라
○
‘나’라는 것도 다 생각이다. 이 몸을 나라고 여기는 것 또한 한 생각일 뿐이다. '나'라고 하는 한 생각을 멈추고 아무런 분별도 일으키지 않고 지금 여기에 그냥 있어보면 어떠한가? 아무 일이 없다. 한 생각 일으켜 일을 만들지만 않으면, 그냥 아무 일이 없게 된다. 그렇게 일없이 살게 되니, 그래서 평화롭다 하는 것이다.
아무 일이 없는 가운데 평화롭게 고요히 앉아 있을 때, 내 몸, 내 생각을 모두 빼고, 보이고 들리는 그 어떤 것에서든 이름과 상을 다 빼고 나면... 진짜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저 묵연히 있을 때 실제로는 무엇이 있는가? 뚜렷이 살아있는 그 하나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본래의 상태이다.
그저 어떠한 움직임이 알아차려질 뿐. 모든 것의 바탕으로서 있으며 그저 알아차리고 있을 뿐. 이것만이 진짜 있는 것일 뿐. 내가 만든 모든 상은 다 가상현실일 뿐이다.
내 인생에서 이 진짜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라!
○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의 첫 번째 방법은 정견이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바르게 보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늘 있던 지금 이대로를 그저 확인하는 것뿐이다. 허상의 ‘나’가 아닌 실상의 진짜 나를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 공부다.

#3 ≪마조어록34≫
분주무업이 마조를 참례하였다. 마조는 그의 훤칠한 용모와 종소리같이 우렁찬 목소리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불당은 높고 당당한데 그 안에 부처가 없구나."
무업이 절을 하고 꿇어앉아 물었다.
"삼승의 교학은 대강이나마 공부하였습니다만, 늘 듣기로 선문에서는 바로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니, 그것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만 알지 못하는 마음이 곧 이것이고, 다시 다른 물건은 없다네."
무업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와 비밀리에 전한 심인(心印 마음도장)입니까?"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이 스님은 정말 시끄럽구나. 우선 갔다가 다른 때 오게."
무업이 막 나가는데, 그 때 마조가 불렀다.
"스님!"
무업이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무업이 곧 깨닫고는 절을 하니, 마조가 말했다.
"이 둔한 사람아, 절은 해서 뭐하나?"
≪마조어록≫ 중에서
스님의 강설
분주무업 선사는 교학을 공부하고, 용모도 훤칠하나 아직 법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마조를 찾아와 참구한다.
마조는 그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불당은 으리으리하나 그 안에 부처가 없다고 말한다. 불당 안에 부처가 없을 리가 없거늘, 무업이 자꾸 부처가 없다고 허망한 망상을 품고 있음을 빗대어 이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본래 깨달아 있으므로 본각(本覺)이지만, 이 분주무업 선사처럼 스스로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는 허망한 망상 분별을 지니고 살다가 그 분별을 내리고 비로소 다시 본래 부처였음을 깨닫기 시작할 때를 일러 시각(始覺)이라 한다.
이어서 마조는 "다만 알지 못하는 마음이 곧 이것"이라 말하지만 무업은 여전히 알아듣지를 못하고 조사가 서쪽에서 와 비밀리에 전한 심인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자 마조는 무업을 돌려보낸다.
하지만 바로 그 때, 뒤돌아 가는 무업을 다시 “스님!” 하며 불러 세우는 마조의 한 마디에 무업은 고개를 휙 돌려 돌아보게 되고, “이것은 무엇이냐?”하고 다시 묻는 말 앞에 그 자리에서 분별을 내리고 곧장 깨닫게 된다.
스승과 제자의 이심전심 줄탁동시 끝에 마침내 이렇게 깨달음의 기연을 이루어 낸 것이다.
분주무업은 무엇을 써서 마조스님의 말을 들었으며, 무엇으로 고개를 돌리고 무엇으로 절을 하였던가? 그저 곧장 이것이다.
저 무업선사 뿐 아니라 누구나 다 쓰며 살고 있는 이것 하나 뿐인 소식이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법상스님>

8월 29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34≫ 거대한 괴로움의 틀을 깨고...
#1 깨달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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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이라는 시대는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한 분의 스승이 법을 전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인해 법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다보니, 이제 ‘깨달음’이라는 말조차도 거추장스러워졌다.
과거에는 깨달음이라면 부처님이나 아니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이라고만 여겼겠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점점 알아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깨달음이라는 말은 그 동안 너무 오염되어 있었다. 깨달음은 부처님 같은 분들께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상을 갖게 되면, 이 깨달음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너무 멀리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저 위에 두고 있었던 ‘깨달음의 신화’들을 이제는 우리의 곁으로 끌어내려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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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왔다가 가는 일이다. 건강도, 돈도, 명예도, 권력도, 사랑도, 자식도 모두 알 수 없는 중중무진의 연기관계 속에서 인연 따라 알아서 저절로 왔다 가는 것들이다. 머릿속으로 온갖 인과관계를 그리고 따져보지만, 실은 그것들은 모두 생각일 뿐, 우리가 머리로 헤아려 알 수 있는 단순한 원인과 결과대로 일들이 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들은 모두 남 탓이라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숱한 인과관계를 만들지만, 실은 내 주변의 남들에게 탓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연기법의 인연으로 나에게 온 일들이므로 모두가 자기의 일이다. 모두가 내 일이다.
그러니 내가 바뀌면 내 가까운 인연들이 다 바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움켜쥐고 있던 생각들을 다 놓아버릴 때, 그 때 우리의 삶은 원래 이럴 뿐이다. 원래 이대로인 삶이 가장 자연스러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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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생각을 일으키되 그 생각이 실제가 아니며 인연 따라 왔다 가는 것임을 알아 그 한 생각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음에 눈 뜨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세상은 그저 이러할 뿐이다.
깨닫고 나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지금 이렇게 된다. 지금 이대로가 저절로 온전히 허용되어,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삶에 더 이상 시비 걸지 않게 된다.
그럼 무엇이 깨달음인가? 지금 우리는 모두 깨달아 있다. 그러나 생각이 그 진리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 생각만 쥐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바로 자연스럽게 그냥 이대로 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2 진짜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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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것도 다 생각이다. 이 몸을 나라고 여기는 것 또한 한 생각일 뿐이다. '나'라고 하는 한 생각을 멈추고 아무런 분별도 일으키지 않고 지금 여기에 그냥 있어보면 어떠한가? 아무 일이 없다. 한 생각 일으켜 일을 만들지만 않으면, 그냥 아무 일이 없게 된다. 그렇게 일없이 살게 되니, 그래서 평화롭다 하는 것이다.
아무 일이 없는 가운데 평화롭게 고요히 앉아 있을 때, 내 몸, 내 생각을 모두 빼고, 보이고 들리는 그 어떤 것에서든 이름과 상을 다 빼고 나면... 진짜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저 묵연히 있을 때 실제로는 무엇이 있는가? 뚜렷이 살아있는 그 하나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본래의 상태이다.
그저 어떠한 움직임이 알아차려질 뿐. 모든 것의 바탕으로서 있으며 그저 알아차리고 있을 뿐. 이것만이 진짜 있는 것일 뿐. 내가 만든 모든 상은 다 가상현실일 뿐이다.
내 인생에서 이 진짜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라!
○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의 첫 번째 방법은 정견이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바르게 보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늘 있던 지금 이대로를 그저 확인하는 것뿐이다. 허상의 ‘나’가 아닌 실상의 진짜 나를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 공부다.
#3 ≪마조어록34≫
분주무업이 마조를 참례하였다. 마조는 그의 훤칠한 용모와 종소리같이 우렁찬 목소리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불당은 높고 당당한데 그 안에 부처가 없구나."
무업이 절을 하고 꿇어앉아 물었다.
"삼승의 교학은 대강이나마 공부하였습니다만, 늘 듣기로 선문에서는 바로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니, 그것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만 알지 못하는 마음이 곧 이것이고, 다시 다른 물건은 없다네."
무업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와 비밀리에 전한 심인(心印 마음도장)입니까?"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이 스님은 정말 시끄럽구나. 우선 갔다가 다른 때 오게."
무업이 막 나가는데, 그 때 마조가 불렀다.
"스님!"
무업이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무업이 곧 깨닫고는 절을 하니, 마조가 말했다.
"이 둔한 사람아, 절은 해서 뭐하나?"
≪마조어록≫ 중에서
스님의 강설
분주무업 선사는 교학을 공부하고, 용모도 훤칠하나 아직 법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마조를 찾아와 참구한다.
마조는 그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불당은 으리으리하나 그 안에 부처가 없다고 말한다. 불당 안에 부처가 없을 리가 없거늘, 무업이 자꾸 부처가 없다고 허망한 망상을 품고 있음을 빗대어 이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본래 깨달아 있으므로 본각(本覺)이지만, 이 분주무업 선사처럼 스스로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는 허망한 망상 분별을 지니고 살다가 그 분별을 내리고 비로소 다시 본래 부처였음을 깨닫기 시작할 때를 일러 시각(始覺)이라 한다.
이어서 마조는 "다만 알지 못하는 마음이 곧 이것"이라 말하지만 무업은 여전히 알아듣지를 못하고 조사가 서쪽에서 와 비밀리에 전한 심인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자 마조는 무업을 돌려보낸다.
하지만 바로 그 때, 뒤돌아 가는 무업을 다시 “스님!” 하며 불러 세우는 마조의 한 마디에 무업은 고개를 휙 돌려 돌아보게 되고, “이것은 무엇이냐?”하고 다시 묻는 말 앞에 그 자리에서 분별을 내리고 곧장 깨닫게 된다.
스승과 제자의 이심전심 줄탁동시 끝에 마침내 이렇게 깨달음의 기연을 이루어 낸 것이다.
분주무업은 무엇을 써서 마조스님의 말을 들었으며, 무엇으로 고개를 돌리고 무엇으로 절을 하였던가? 그저 곧장 이것이다.
저 무업선사 뿐 아니라 누구나 다 쓰며 살고 있는 이것 하나 뿐인 소식이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