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 38》 바꿀 수 없는 괴로운 상황일 때
#1 바꿀 수 없는 괴로운 상황일 때
[질문]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에게, 엄마로서 늘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다른 가족들에게까지 책임감과 부담감을 주게 되니, 가족들마저도 아프고 병들게 되어 무척 괴롭고 힘든 상황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스님의 말씀]
○
이와 같이 온갖 괴로움으로 고통받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힘들수 밖에 없을 괴로운 상황에 처한 분들만 힘들까?그렇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똑같이 나름의 괴로운 상황들을 겪고 있다.
보기에는 그리 힘들 것 같지 않은 듯한 상황에 있음에도 너무 괴로워하며 극단적인 자살 등을 선택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실은 각자가 처한 그 상황들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나의 해석과 나의 부담감이 문제이다. 스스로가 그 상황을 괴로운 상황이라고 해석하고 그 괴로움에 짓눌려 사는 것이다. 스스로가 만든 괴로움이다.
똑같이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마음공부를 하시는 분들 중에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저 이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하시며 남들과 비교하며 상황을 원망하는 대신, 주어진 상황을 온전히 인정하며 수용하는 분들도 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들에 사로잡혀 버린다. 뻔히 실체가 아닌 줄을 알면서도 사로잡혀 괴로워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 중생들의 집착의 특징이다.
○
그 상황 자체는 나를 얽어매지 않는다. 상황은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그 상황에 깊이 개입하고 빠져들어서 구속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지옥을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이 지옥이라는 것이 다 자기 한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아무 문제될 것같지 않은 상황이 자신의 한 생각에 의해서 자신에게만 끔찍한 지옥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내 조건이 지금 최악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렇게들 많이 문의를 하시지만, 실은 그 조건이 최악이라는 그 생각때문에 그 조건이 최악이 되는 것이다. 흑인이 자신의 조건을 백인과 비교하면서 '나는 백인이 되고 싶어' 하면서 괴로워 한다면, 그 생각때문에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괴로워해야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모든 상황과 조건은 인연법을 따라 온 일이며, 인연이라는 것은 그냥 왔다가 가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연따라 나를 깨어나게 하기 위해 그 상황이 내게 왔다가 가는 것이다. 그렇게 왔다가 가는 것은 실체가 없으며 진짜 내가 아니다. 진짜 나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나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모든 문제와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떠한 괴로운 일이든 나에게 인연따라 생길 수 있다. 그것이 이 인간계의 삶이다. 누구에게든 어떠한 일이든 다 생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의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다양성일 뿐이다. 있는 그대로일 뿐, 좋은 상황 나쁜 상황이 따로 없다. 정상적 상황, 비정상적 상황이 따로 없다.
○
지금 장애를 가진 아픈 아이가 나에게 주어진 나의 인연이라면, 이 일을 겪어내야 하는 것이라면, 이 일은 나의 깨달음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나의 깨달음의 조건을 이렇게 이 아이가 갖추어 주고 있는데, 나는 계속 허망한 분별을 계속하며 그 괴로움 속에 빠져 힘들게 산다면, 그것은 나와 자식들 모두를 괴롭히는 일이 된다.
내가 빨리 깨어나서, '이것이 내 마음이 만든 괴로움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아이가 그러한 장애를 안고 태어나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아이에게도 보답을 하고 자신에게도 보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그래야만 아이도 더 행복해 질 수 있다. 불편함은 있겠지만, 그 불편함은 살아가면서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죽음과 슬픔을 대할 때
[질문]
사랑하는 반려견의 죽음에 힘든데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스님의 말씀]
반려견이 죽거나, 사람이 죽거나 모두 마찬가지다. 죽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며,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 또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죽음이 찾아오면 죽으면 되고 슬프면 슬퍼하면 된다.
슬픔을 문제라고 여기거나 극복해야할 장애라고 여기기 시작할 때 이 상황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슬플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이미 슬프고 이러한 자기가 이미 답이다. 인연따라 온전히 슬퍼해 주면 된다.

#3 깨닫고 싶은데
[질문]
깨닫고 싶은데 진정성이 없는 것인지, 발심이 부족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깨달음 이후 나타나는 외향적 특징에 관심이 있어 잘 안되는 것일까요?
[스님의 말씀]
○
깨달아서 나타나는 외향적 특성? 그런 것은 없다. 깨달음은 가장 본연의 순수한 것이라야 한다. 의도가 가장 순수해야 한다.
깨달음이란 이럴 거야, 깨닫고 나면 어떤 어떤 것들이 생겨날거야... 이렇게 생각하며 공부하고 있다면, 이것은 자아를 강화시키기 위한 공부가 아닌가? 내가 먼저 깨닫고 싶고, 그래서 남들보다 우월하고 싶은 마음으로 공부를 하는데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깨닫고 싶다 하는 말도 썩 바르지 못하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무슨 엄청난 큰 일이 아니라, 단지 괴로움을 소멸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일 뿐이다. 괴로움이 소멸되었는데 외적으로 무엇이 달라질 것이 있을까?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실상이 아니다.
무엇이든 쥐고 있으면 안된다. 공부에 대한 상도 마찬가지다. 쥘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실상이 아니므로 무엇 하나 쥘 것이 없다.
내 몸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조건도 진짜가 아니다. 이 중중무진의 연기의 세상은 인간의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이 삼라만상 현상세계는 우리가 법이라고, 마음이라고 이름 부르는, 혹은 법성, 자성, 불성, 열반, 해탈이라 이름 부르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이 법 하나가, 이 진실 하나가 거짓으로 만들어 낸 세상이다.
그러니 꿈의 세계와도 같다. 꿈의 내용은 진정한 내가 아니듯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좋은 현실이 진짜 내가 아니며 나쁜 현실이 진짜 내가 아니다. 좋고 나쁜 현실이 따로 없다. 그저 다 이 마음 하나가 드러나고 있을 뿐.

#4 《마조어록 38》
양좌주가 마조를 참례하자 마조가 물었다,
"좌주께선 경론을 잘 강설하신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양좌주가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강의합니까?"
"마음을 가지고 강의합니다."
"마음은 재주를 잘 부리는 광대와 같고, 의식은 광대놀이에 장단을 맞추어 노는 자와 같은데, 그것이 어떻게 경(經)을 강의하겠습니까?"
양좌주가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마음이 강의하지 못한다면, 허공이 강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리어 허공이 강의할 수 있습니다."
양좌주는 긍정하지 않고 곧 나갔다. 막 계단을 내려가려 하는데, 마조가 불렀다.
"좌주!"
양좌주는 머리를 돌리다 문득 크게 깨닫고는 곧 절을 올렸다.
"이 둔한 스님아, 절은 무엇하러 하는가?"
"나의 경론 강의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마조대사에게 한 번 질문을 받고서 평생의 공부가 얼음이 녹고 기와가 깨지는듯이 사라져 버렸다."
곧장 서산으로 들어가서는 다시는 종적이 없었다.
- 마조어록 중에서

스님의 강설
○
이렇게 마조어록 법문을 시작하며 양좌주가 마조를 참례하러 갔다고 하면, 우리는 단번에 그 말로 시작되는 이야기 속에 몰입하기 시작하여,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하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곧장 언어로 표현되는 내용을 따라가지만, 모든 선어록들을 볼 때는, 내용을 드러내는 그 이면에서 가리키고 있는 이 자리를 제대로 볼 줄 알아야한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곧장 이 자리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양좌주가..."하고 글을 시작할 때, '양'~에서 벌써 곧장 이 법이 딱 드러나고 있다는 말이다. 그대로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이 법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분들이 지금 숨쉬고 고개를 돌리고 법문을 듣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을 다 법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늘 바다 파도 ... 삼라만상 모든 것이 다 그대로 법이라는 말이다. 모양있는 모든 것에서 모양없는 하나의 법이 드러나는 것이다.
○
강의에 능숙한 양좌주가 마음으로 강의를 한다고 하자, 마조는 늘 왔다 갔다 하는 분별지인 그 마음으로 어찌 강의를 할 수 있는냐고 하며 도리어 허공이 강의하는 것이 옳다고 전한다.
아무리 경론의 강의에 능하며 20~30년을 공부했다 할지라도, 부족함이 있으니 더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선지식을 참례하고자 왔다면, '나'를 완전히 내려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 어떤 일도 내가 하는 일이 아님을 완전히 인정해야 한다. 공부인이라면 늘 하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양좌주는 마조의 말에 수긍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 나간다.
○
그렇게 돌아서 가는 양좌주를 마조가 부르자, 그 부름에 그 자리에서 곧장 깨친 양좌주! 큰 절을 올리며 대사의 한 번 물음에 평생의 공부가 얼음이 녹고 기와가 부서지듯이 사라져 버렸음에 감사한다.
평생 자신이 붙잡고 있던 공부가 최고인 줄 알고 있다가 마조대사로 인해 크게 깨친 후에야, 평생 해왔던 공부가 하나 붙잡을 것이 없었음을 알고는 모두 놓아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법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이렇게 법이라 할 것도 따로 없음을, 법이라고 붙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온전히 알게 된다.
법이란 것이 이것이구나, 이제 잡았다, 제대로 깨달았다... 이렇게 안주할 만 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한 평생 붙잡고 해왔던 공부에 대한 상이 비로소 얼음이 녹고 기와가 부서지듯 일시에 사라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공부이며 이것이 진짜 깨달음이다.
- 법상스님 말씀

10월 10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 38》 바꿀 수 없는 괴로운 상황일 때
#1 바꿀 수 없는 괴로운 상황일 때
[질문]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에게, 엄마로서 늘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다른 가족들에게까지 책임감과 부담감을 주게 되니, 가족들마저도 아프고 병들게 되어 무척 괴롭고 힘든 상황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스님의 말씀]
○
이와 같이 온갖 괴로움으로 고통받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힘들수 밖에 없을 괴로운 상황에 처한 분들만 힘들까?그렇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똑같이 나름의 괴로운 상황들을 겪고 있다.
보기에는 그리 힘들 것 같지 않은 듯한 상황에 있음에도 너무 괴로워하며 극단적인 자살 등을 선택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실은 각자가 처한 그 상황들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나의 해석과 나의 부담감이 문제이다. 스스로가 그 상황을 괴로운 상황이라고 해석하고 그 괴로움에 짓눌려 사는 것이다. 스스로가 만든 괴로움이다.
똑같이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마음공부를 하시는 분들 중에는,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저 이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하시며 남들과 비교하며 상황을 원망하는 대신, 주어진 상황을 온전히 인정하며 수용하는 분들도 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사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들에 사로잡혀 버린다. 뻔히 실체가 아닌 줄을 알면서도 사로잡혀 괴로워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 중생들의 집착의 특징이다.
○
그 상황 자체는 나를 얽어매지 않는다. 상황은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그 상황에 깊이 개입하고 빠져들어서 구속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지옥을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이 지옥이라는 것이 다 자기 한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아무 문제될 것같지 않은 상황이 자신의 한 생각에 의해서 자신에게만 끔찍한 지옥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내 조건이 지금 최악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렇게들 많이 문의를 하시지만, 실은 그 조건이 최악이라는 그 생각때문에 그 조건이 최악이 되는 것이다. 흑인이 자신의 조건을 백인과 비교하면서 '나는 백인이 되고 싶어' 하면서 괴로워 한다면, 그 생각때문에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괴로워해야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모든 상황과 조건은 인연법을 따라 온 일이며, 인연이라는 것은 그냥 왔다가 가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연따라 나를 깨어나게 하기 위해 그 상황이 내게 왔다가 가는 것이다. 그렇게 왔다가 가는 것은 실체가 없으며 진짜 내가 아니다. 진짜 나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나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모든 문제와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떠한 괴로운 일이든 나에게 인연따라 생길 수 있다. 그것이 이 인간계의 삶이다. 누구에게든 어떠한 일이든 다 생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의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다양성일 뿐이다. 있는 그대로일 뿐, 좋은 상황 나쁜 상황이 따로 없다. 정상적 상황, 비정상적 상황이 따로 없다.
○
지금 장애를 가진 아픈 아이가 나에게 주어진 나의 인연이라면, 이 일을 겪어내야 하는 것이라면, 이 일은 나의 깨달음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나의 깨달음의 조건을 이렇게 이 아이가 갖추어 주고 있는데, 나는 계속 허망한 분별을 계속하며 그 괴로움 속에 빠져 힘들게 산다면, 그것은 나와 자식들 모두를 괴롭히는 일이 된다.
내가 빨리 깨어나서, '이것이 내 마음이 만든 괴로움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아이가 그러한 장애를 안고 태어나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아이에게도 보답을 하고 자신에게도 보답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그래야만 아이도 더 행복해 질 수 있다. 불편함은 있겠지만, 그 불편함은 살아가면서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죽음과 슬픔을 대할 때
[질문]
사랑하는 반려견의 죽음에 힘든데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스님의 말씀]
반려견이 죽거나, 사람이 죽거나 모두 마찬가지다. 죽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며,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 또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죽음이 찾아오면 죽으면 되고 슬프면 슬퍼하면 된다.
슬픔을 문제라고 여기거나 극복해야할 장애라고 여기기 시작할 때 이 상황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슬플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이미 슬프고 이러한 자기가 이미 답이다. 인연따라 온전히 슬퍼해 주면 된다.
#3 깨닫고 싶은데
[질문]
깨닫고 싶은데 진정성이 없는 것인지, 발심이 부족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깨달음 이후 나타나는 외향적 특징에 관심이 있어 잘 안되는 것일까요?
[스님의 말씀]
○
깨달아서 나타나는 외향적 특성? 그런 것은 없다. 깨달음은 가장 본연의 순수한 것이라야 한다. 의도가 가장 순수해야 한다.
깨달음이란 이럴 거야, 깨닫고 나면 어떤 어떤 것들이 생겨날거야... 이렇게 생각하며 공부하고 있다면, 이것은 자아를 강화시키기 위한 공부가 아닌가? 내가 먼저 깨닫고 싶고, 그래서 남들보다 우월하고 싶은 마음으로 공부를 하는데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깨닫고 싶다 하는 말도 썩 바르지 못하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무슨 엄청난 큰 일이 아니라, 단지 괴로움을 소멸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일 뿐이다. 괴로움이 소멸되었는데 외적으로 무엇이 달라질 것이 있을까?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실상이 아니다.
무엇이든 쥐고 있으면 안된다. 공부에 대한 상도 마찬가지다. 쥘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 실상이 아니므로 무엇 하나 쥘 것이 없다.
내 몸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조건도 진짜가 아니다. 이 중중무진의 연기의 세상은 인간의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이 삼라만상 현상세계는 우리가 법이라고, 마음이라고 이름 부르는, 혹은 법성, 자성, 불성, 열반, 해탈이라 이름 부르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이 법 하나가, 이 진실 하나가 거짓으로 만들어 낸 세상이다.
그러니 꿈의 세계와도 같다. 꿈의 내용은 진정한 내가 아니듯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좋은 현실이 진짜 내가 아니며 나쁜 현실이 진짜 내가 아니다. 좋고 나쁜 현실이 따로 없다. 그저 다 이 마음 하나가 드러나고 있을 뿐.
#4 《마조어록 38》
양좌주가 마조를 참례하자 마조가 물었다,
"좌주께선 경론을 잘 강설하신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양좌주가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강의합니까?"
"마음을 가지고 강의합니다."
"마음은 재주를 잘 부리는 광대와 같고, 의식은 광대놀이에 장단을 맞추어 노는 자와 같은데, 그것이 어떻게 경(經)을 강의하겠습니까?"
양좌주가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마음이 강의하지 못한다면, 허공이 강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리어 허공이 강의할 수 있습니다."
양좌주는 긍정하지 않고 곧 나갔다. 막 계단을 내려가려 하는데, 마조가 불렀다.
"좌주!"
양좌주는 머리를 돌리다 문득 크게 깨닫고는 곧 절을 올렸다.
"이 둔한 스님아, 절은 무엇하러 하는가?"
"나의 경론 강의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마조대사에게 한 번 질문을 받고서 평생의 공부가 얼음이 녹고 기와가 깨지는듯이 사라져 버렸다."
곧장 서산으로 들어가서는 다시는 종적이 없었다.
- 마조어록 중에서
스님의 강설
○
이렇게 마조어록 법문을 시작하며 양좌주가 마조를 참례하러 갔다고 하면, 우리는 단번에 그 말로 시작되는 이야기 속에 몰입하기 시작하여,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하면서 이야기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곧장 언어로 표현되는 내용을 따라가지만, 모든 선어록들을 볼 때는, 내용을 드러내는 그 이면에서 가리키고 있는 이 자리를 제대로 볼 줄 알아야한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곧장 이 자리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양좌주가..."하고 글을 시작할 때, '양'~에서 벌써 곧장 이 법이 딱 드러나고 있다는 말이다. 그대로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이 법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분들이 지금 숨쉬고 고개를 돌리고 법문을 듣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을 다 법이 하고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늘 바다 파도 ... 삼라만상 모든 것이 다 그대로 법이라는 말이다. 모양있는 모든 것에서 모양없는 하나의 법이 드러나는 것이다.
○
강의에 능숙한 양좌주가 마음으로 강의를 한다고 하자, 마조는 늘 왔다 갔다 하는 분별지인 그 마음으로 어찌 강의를 할 수 있는냐고 하며 도리어 허공이 강의하는 것이 옳다고 전한다.
아무리 경론의 강의에 능하며 20~30년을 공부했다 할지라도, 부족함이 있으니 더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선지식을 참례하고자 왔다면, '나'를 완전히 내려놓아야 했을 것이다. 그 어떤 일도 내가 하는 일이 아님을 완전히 인정해야 한다. 공부인이라면 늘 하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양좌주는 마조의 말에 수긍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 나간다.
○
그렇게 돌아서 가는 양좌주를 마조가 부르자, 그 부름에 그 자리에서 곧장 깨친 양좌주! 큰 절을 올리며 대사의 한 번 물음에 평생의 공부가 얼음이 녹고 기와가 부서지듯이 사라져 버렸음에 감사한다.
평생 자신이 붙잡고 있던 공부가 최고인 줄 알고 있다가 마조대사로 인해 크게 깨친 후에야, 평생 해왔던 공부가 하나 붙잡을 것이 없었음을 알고는 모두 놓아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법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이렇게 법이라 할 것도 따로 없음을, 법이라고 붙잡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온전히 알게 된다.
법이란 것이 이것이구나, 이제 잡았다, 제대로 깨달았다... 이렇게 안주할 만 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한 평생 붙잡고 해왔던 공부에 대한 상이 비로소 얼음이 녹고 기와가 부서지듯 일시에 사라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공부이며 이것이 진짜 깨달음이다.
- 법상스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