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Simon
202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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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큰 불사가 진행중인 불국사 근처에 이르러 땀을 훔치던 아사달의 눈에 거울처럼 맑고 깨끗한 연못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노독으로 부어오른 다리도 쉬게 해줄 겸, 그 연못으로 다가가 얼굴을 씻으려던 아사달은 물 속에 비친 아주 기이하게 생긴 바위 하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주변을 살폈습니다. 연못 건너편을 보니 조금만 손을 대면 곧바로 좌불 석상이 될 것 같은 바위 하나가 신령스러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석가탑을 완성하고 나면, 허락을 받아서 저 바위로 고금에 보기 드문 좌불 하나를 만들어야지.'

“마음에 비치는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탑을 만들어주시오.“
한 걸음에 달려나와 아사달의 거친 두 손을 귀하게 부여잡고, 간곡한 어조로 부탁을 하는 김대성의 눈에서는 마주보기 힘든 빛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그 눈빛을 보자 아사달도 덩달아 가슴이 뜨거워져 김대성의 손을 더욱 굳게 잡았습니다.
'나는 황룡사 구층석탑을 지은 백제사람 아비지의 후손으로 당대 제일의 석공. 내 생애와 내 명예를 걸고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탑 하나를 쌓고 말리라.'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일명 석가탑).
석가여래가 설법한 정신세계를 담아내어야 한다는 탑의 이름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석가여래 곁에서 석가여래의 설법을 증명하리라는 원을 낸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다보여래탑(일명 다보탑)은 신라 석공들에 의해 이미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돌을 깨고 돌을 다듬는 소리가 토함산 언저리를 쩡쩡 울리고 있었습니다.

아사달은 매일 어두운 길을 밟아 동트지 않은 토함산에 올랐고, 정상의 바위 위에 정좌하여 일출을 보면서 가다듬은 마음으로 수많은 탑의 형상들을 짓고 또 부수곤 했습니다.
형상을 가진 탑으로 어떻게 형상이 아닌 정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아사달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같은 자리에 정좌한 채 일출을 기다리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마침 낮게 깔린 운무가 해가 솟을 자리를 뿌옇게 가리고 있었습니다.
일출의 시간, 일출의 장엄함에 운무도 겁에 질렸을까요?
일순 운무가 좌우로 갈라지며, 바닷가에 자리한 문무대왕릉 너머로 수평선 아득한 곳에서 온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거칠 것 없이 해가 솟아올랐습니다. 눈부신 광휘가 눈을 뜰 수 없게 만들 때까지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눈을 감던 아사달의 입에서 "아...아름답다...!" 감탄사가 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그 순간...

“해는 제 스스로 제 아름다움을 아는가?“
범종소리처럼 우렁찬 질문 하나가 아사달의 마음에서 솟구쳐 올라왔고, 아사달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우러나왔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내 마음이 지어낸 느낌일 뿐, 해는 그저 무심히 떠올랐다가 무심히 진다.“
“마음으로 짓는 것은 허상일 뿐, 그저 무심한 손길에 나를 맡겨야 하느니...“
“무심한 마음엔 빛도 그림자도 없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세월은 또 얼마나 흘러갔는지...그 날 이후 아사달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아사녀가 애태우며 그를 기다릴 것이란 초조감도 더 이상은 들지 않았습니다.
돌이 있으니 그 돌을 쪼개고, 쪼갠 돌이 보이니 그 돌을 다듬고, 그저 무심한 마음 따라 손길 가는 대로 돌을 빚어 탑을 쌓아나갔습니다. 비가 오면 빗소리 따라 손길이 나가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잎이 지면 지는 대로, 눈이 오니 눈 따라 마음이 가고 손이 따랐습니다.

김대성이 경건하게 석가의 진신 사리와 다라니경을 탑 안에 넣고 3층 지붕돌을 올리자, 토함산은 수많은 승려가 한꺼번에 외는 염불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거창하고 화려한 완공 축하연에서 멀찍이 비켜나 큰 나무 그늘아래 앉은 아사달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석가탑을 무심히 바라보았습니다. 온갖 뛰어난 석공들의 손재주들이 다 발휘된 화려하고 아름다운 다보탑 가까이에 화려함이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탑 하나가 의연한 모습으로 서있었습니다.

두 손이 가슴 앞으로 모여 합장이 되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나무 관세음 보살~~ 나무 관세음 보살~~“
승려들의 염불 소리에 맞추어 아사달의 발과 무릎과 팔과 손과 이마가 땅에 닿았습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나서야 아사달이 몸을 일으켰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오~!“
행장을 꾸리는 아사달에게 달려온 스님은 뜬금 없이 자기 잘못이 아니란 말부터 했습니다.
“무슨 말이오. 스님 잘못이 아니라니...“
“저 아래 연못은 탑 공사가 있을 때마다, 탑 공사가 시작되면 그 그림자가 비치는 신령스러운 연못이었소.“
“아...제가 오는 길에 본 그 연못을 말하는군요.“
“그런데...당신이 만든 석가탑은 처음부터 완성될 때까지 한번도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소.“

일출을 보다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던 그 대답이 떠올랐습니다.
“무심한 마음엔 빛도 그림자도 없다...“

“그런데요? 스님 잘못은 무어란 말이오?“
“당신 아내가 당신이 여기 온 후 이년쯤 지나 찾아왔었소. 탑이 완성되기 전에 여자를 경내로 들여서는 안 된다는 엄명이 있어서, 내 딴에는 당신 아내를 위하는 마음에, 그 연못에 가서 탑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기다리라고 일러주었소.“
탑 쌓느라 그간 까맣게 잊고 지낸 아사녀의 고운 얼굴을 떠올리자, 아사달의 가슴으로 동해의 파도처럼 아사녀에 대한 그리움이 힘차게 밀려들었습니다.
“그래서요? 그럼 아사녀가 지금 여기 가까이 어디 있단 말인가요? 근데 잘못이라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져 성급하게 묻는 아사달을 보며 승려의 얼굴은 더욱 어둡게 굳어졌습니다.
“그런데...탑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소. 옆의 다보탑은 선명하게 그림자가 비치는데...무슨 연유였는지 석가탑은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던 모양이오. 내가 여기 있었다면 석가탑이 얼마나 만들어지고 있는지 말로라도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그 말을 해준 후, 멀리 떠나있었던 관계로 당신 아내는 날마다 그 연못에서 석가탑 그림자만 비치길 기다렸던 모양이오.“
“그래서요?“
“결국 기다리다 지친 당신 아내가 그 연못에 몸을 던진 모양이오.“

그 못으로 달려가는 아사달의 발걸음이 급해졌습니다. 빨리 달려가 본들 아사녀가 살아 돌아 올 리도 없건만...터질 것 같은 마음을 그렇게라도 급히 달리지 않으면 달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보~~ 아사녀~~~~“
울부짖으며 달려간 그 연못엔 석양에 걸린 해만 무심하게 비칠 뿐 아사녀의 흔적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여보....사랑하는...아사달...당신이...돌아오셨군요...“
연못가에 엎어져 한참을 울던 아사달의 귀에 환청인지 아사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를 쫓아 고개를 든 아사달의 눈에 불국사를 들어가며 보았던 그 신령스러운 바위가 보였는데, 그 바위가 아사녀로 변한 채 아사달을 손짓해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사녀를 부르며 연못 건너편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아사달. 그러나 그곳엔 다시금 바위로 변환 그 신령스러운 바위만 덩그러니 있고 아사녀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한참 동안 그 신령스러운 바위를 바라보던 아사달이 등에 진 행장을 내려 풀더니 정과 망치를 끄집어냈습니다.
“아사녀. 당신을 이 바위에 새겨 오래도록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하게 해주겠소.“
앙 다문 아사달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아사달이 바위에 댄 정을 치려고 망치 잡은 손을 뒤로 재꼈을 때,
“부질없고 부질없구나...부처를 만든 손으로 부처를 죽이려느냐...“
일출을 보다가 범종처럼 마음에서 솟아오르던 그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습니다.
“여기 부처가 어디 있다고...?“
“네 마음 따라 좌불로 보이고 아사녀로 보이는 그 바위가 부처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바위가 제 스스로 형상을 짓는 적이 있더냐...“
정과 망치를 잡고 부들부들 떨던 아사달의 손이 아래로 떨구어졌습니다.

그 밤, 그 연못에 비친 보름달에는 행장을 다시 꾸려 연못을 떠나던 아사달의 등뒤로 그 바위가 오래도록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모습이 보였다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림자가 비치지 않은 석가탑을 그래서 무영탑이라고도 부르며 아사달과 아사녀의 안타까운 사랑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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