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1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43≫
두려워말고 안심해도 좋은 이유-당신은 괜찮아요
#1 자기를 깨닫는 공부
10년 20년 동안을 부처님 가르침을 구하고자 험난한 구법여행을 다니셨던 현장스님이나 혜초스님의 위법망구의 정신을, 멀리서 이렇게 대원정사로 구법여행을 오신 여러분들이시라면 다 알고 이해하시지 않을까 한다. 다 같은 마음들이실 것이리라 생각한다.
부처님이 계시던 시대에서 2500년이나 넘게 지나온 지금의 이 시대에도 이렇게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또 이 스님도 함께 감동하는 것은, 이 공부는 부처님의 이야기나 불교 이야기가 아니라 내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 자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공부는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공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공부다. 괴로움을 해결하는 공부이며, 생사를 뛰어넘는 공부이며, 진정한 자기를 확인하는 공부이고,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내는 일대사 공부인 것이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가며 현실의 일들을 바삐 하느라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그렇게 살아가던 인생의 어느 순간,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오는 그런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어느 때를 너무 늦기 전에 이렇게 만나 이 공부와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중요한 자기를 깨닫는 이 공부를 어찌 안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이런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2 ≪마조어록43≫
26.
약산 유엄스님이 처음 석두스님을 참례한 자리에서 물었다.
"3승 12분교라면 제가 대략은 압니다. 남방에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 한다는 소문은 늘 들었는데 정말 알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스님께선 자비로 가르쳐 주십시오."
석두스님이 말했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되며, 이렇게 하거나 이렇게 하지 않거나 둘 다 안된다.
자 어떻게 하겠는가?"
약산스님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석두스님이 말했다.
"그대의 인연은 여기에 있질 않으니 그만 마조스님의 처소로 가보게."
약산스님이 명을 받들어 마조스님께 공손히 절을 하고는 앞에 물었던 것을 그대로 묻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어떤 때는 그에게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작이게 하며, 어떤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어떤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 그대는 어떠한가?"
약산스님이 말끝에 깨치고 절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였다.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나에게 절을 하느냐?"
"제가 석두스님 처소에서는 무쇠 소 등에 달라붙은 모기와도 같았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되었다면 잘 간직하게."
그 뒤 3년 동안 시봉을 하였는데 하루는 스님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요사이 견처가 어떠한가?"
"껍데기는 다 벗겨지고 알맹이 하나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대 마음의 경지가 순조로와 사지까지 편안하다 하겠다. 그렇게 되었을진대 어째서 세 가닥 대테로 아랫배를 조르고 아무데나 가서 주지살이를 하지 않는가?"
"제가 무어라고 감히 주지노릇 한다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네. 항상 다니기만 하고 머물지 말라는 법은 없고, 항상 머물기만 하고 다니지 말라는 법도 없다네. 이익되게 하고 싶어도 이익될 것이 없고, 위하려 하나 위할 것도 없네. 배를 만들어야지. 이 산에 오래 머물지 말게."
이리하여 약산스님은 스님을 하직하였다.
스님의 강설
약산스님은 석두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로서, 석두, 마조 두 대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약산이 처음 석두스님을 만나 남방의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묻는다.
선 공부를 함에 있어서는 인과에 딱 들어맞는 알음알이와 분별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약산스님은 머리로 법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자세로 찾아와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물었으니, 석두스님은 제자가 분별을 여의도록 이끄는 중도의 답을 던져준다.
참된 스승이라면, 분별로 하는 세상의 모든 공부와는 완전히 다른 이 선의 깨달음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할 때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석두스님처럼 그 자리에서 제자의 분별심이 곧장 꽉 막혀버릴 수 있도록 답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둘이 아니면서 하나도 아닌 중도의 깨우침을 던져야 할 것이다.
꽉 막힌 채 마조스님을 찾아간 약산은 마침내 마조의 답에 한 소식을 얻게 된다. 석두와 마조의 바른 가르침이야말로 살활자재(殺活自在)이며, 파주(把住)와 방행(放行)의 방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뛰어난 중도적 안목을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이 두 스승의 살활자재한 가르침을 받고는 마침내 견처가 깊어진 약산에게, 마조는 그만 하직하고 떠나서 임운자재(任運自在)하게 인연 따라 법을 전하고 진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 것을 권한다.

27.
단하 천연스님이 두번째 스님을 참례하러 왔을 때였다. 아직 참례하기도 전에 바로 큰 방에 들어가 나한상의 목을 말타듯 타고 앉았다. 그러자 대중들이 경악하여 급히 스님께 아뢰었다. 스님께서 몸소 큰 방으로 들어가 그를 살펴보더니 말씀하셨다.
"천연한 내 아들이로군."
단하 스님은 즉시 땅으로 내려와 절하며, "대사께서 법호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였는데, 이 인연으로 '천연'이라 이름하였다.
스님의 강설
그 어떤 걸림도 없이 승방의 나한상의 목에 올라타 앉은 천연스러운 단하 천연스님이 보여주듯, 삶이란 이렇게 천연스럽게 본래 있는 그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내가 이 삶을 펼쳐나가기 위해 애써서 뭔가를 열심히 해야할 것은 없다. 이 삶은 그저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을 가만 살펴보면, '내'가 한다 하는 생각은 일어나지만, 실제로 삶에서 '내'가 하는 일은 없다. 그저 일어나고 있을 뿐.
28.
담주 혜랑스님이 처음 참례하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찾아와서 무엇을 구하느냐?"
"부처님의 지견을 구합니다."
"부처님에게는 지견이 없다. 지견은 마구니일 뿐이다. 그대는 어디서 왔느냐?"
"남악에서 왔습니다."
"그대가 남악에서 오긴 했으나 아직 조계의 심요를 모르는구나. 속히 그 곳으로 되돌아가야지, 다른 데로 가서는 안된다."
스님의 강설
부처님의 지견이란 무엇일까? 부처님의 지견이란, '지견 없음' 이다. 지견이 따로 없다는 것이 곧 불지견이다. 어떤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불교 교리는 모두 지견으로서의 교리가 아니라 중생들의 분별을 깨트리기 위한 방편들인 것이다. 그러니 이 또한 살활자재함이다. 지견을 방편으로 쓰지만 또한 그 방편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그 방편도 궁극에는 깨트려주는 것이다.
마조는 담주 혜랑스님에게 이렇게 지견을 구하지도 말고, 더 이상 분별 속에서 헤매지도 말고 곧장 본래자리로 돌아가라고 일침을 가한다.
29.
스님께서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호남에서 왔습니다."
"동정호에는 물이 가득찼더냐?"
"아닙니다."
"때맞은 비가 그렇게나 내렸는데도 아직 가득 차지 않았더냐?"
도오스님은 "가득찼다." 하였고, 운암스님은 "담담하다." 하였으며, 동산은 "어느 겁엔들 모자란 적이 있었으랴." 하였다.
스님의 강설
마조스님의 질문의 뜻을 단박에 꿰뚫어내지 못한 이 스님은 매번 마조의 말을 따라가며 답을 한다. 이에 마조스님은 비가 그렇게나 내렸는데도 아직 동정호가 가득 차지 않았더냐며 답답해하는 듯 하다.
스승이 묻는 이 질문들은 깨달음의 공부를 묻고 있는 것이며, 곧바로 지금 여기서 본래의 자기 자리가 어떠한지를 묻고 있다.
여러분의 진짜 알맹이는 절대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이 부처님의 진짜 가르침은 안심법문이다. 왜 이 법의 진리가 안심법문일 수 밖에 없는지를 이제 여러분이 알아내셔야 한다. 계속 무엇인가를 얻고자 찾으며 추구하던 삶에서 벗어나 더 이상 찾을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가벼운 편안함, 그 안심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한 여러분들이 아직 안심하지 못한듯 하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다. 안심해도 좋다. 아무 걱정말라는 것이다. 믿어도 된다.
그럼 뭘 믿어야 할까? 자기를 믿으라는 것이다. 저 바깥의 부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를 굳게 믿으라는 것이다. 이 몸이나 내 생각말고, 진짜 자기를 믿으라는 것이다.
배고플 때 배고픈 줄 알고, 아플 때 아픈 줄 아는, 모르겠다 하더라도 모르는 줄을 아는 그 자기 자성불. 그 진짜 자기를 굳게 믿고 맡기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완전히 안심해도 좋다.
- 법상스님의 마조어록 법문 말씀 끝

11월 21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43≫
두려워말고 안심해도 좋은 이유-당신은 괜찮아요
#1 자기를 깨닫는 공부
10년 20년 동안을 부처님 가르침을 구하고자 험난한 구법여행을 다니셨던 현장스님이나 혜초스님의 위법망구의 정신을, 멀리서 이렇게 대원정사로 구법여행을 오신 여러분들이시라면 다 알고 이해하시지 않을까 한다. 다 같은 마음들이실 것이리라 생각한다.
부처님이 계시던 시대에서 2500년이나 넘게 지나온 지금의 이 시대에도 이렇게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또 이 스님도 함께 감동하는 것은, 이 공부는 부처님의 이야기나 불교 이야기가 아니라 내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 자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공부는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공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공부다. 괴로움을 해결하는 공부이며, 생사를 뛰어넘는 공부이며, 진정한 자기를 확인하는 공부이고,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내는 일대사 공부인 것이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가며 현실의 일들을 바삐 하느라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그렇게 살아가던 인생의 어느 순간, 말할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오는 그런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어느 때를 너무 늦기 전에 이렇게 만나 이 공부와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중요한 자기를 깨닫는 이 공부를 어찌 안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이런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2 ≪마조어록43≫
26.
약산 유엄스님이 처음 석두스님을 참례한 자리에서 물었다.
"3승 12분교라면 제가 대략은 압니다. 남방에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 한다는 소문은 늘 들었는데 정말 알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스님께선 자비로 가르쳐 주십시오."
석두스님이 말했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안되며, 이렇게 하거나 이렇게 하지 않거나 둘 다 안된다.
자 어떻게 하겠는가?"
약산스님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석두스님이 말했다.
"그대의 인연은 여기에 있질 않으니 그만 마조스님의 처소로 가보게."
약산스님이 명을 받들어 마조스님께 공손히 절을 하고는 앞에 물었던 것을 그대로 묻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어떤 때는 그에게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작이게 하며, 어떤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어떤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 그대는 어떠한가?"
약산스님이 말끝에 깨치고 절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였다.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나에게 절을 하느냐?"
"제가 석두스님 처소에서는 무쇠 소 등에 달라붙은 모기와도 같았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되었다면 잘 간직하게."
그 뒤 3년 동안 시봉을 하였는데 하루는 스님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요사이 견처가 어떠한가?"
"껍데기는 다 벗겨지고 알맹이 하나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대 마음의 경지가 순조로와 사지까지 편안하다 하겠다. 그렇게 되었을진대 어째서 세 가닥 대테로 아랫배를 조르고 아무데나 가서 주지살이를 하지 않는가?"
"제가 무어라고 감히 주지노릇 한다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네. 항상 다니기만 하고 머물지 말라는 법은 없고, 항상 머물기만 하고 다니지 말라는 법도 없다네. 이익되게 하고 싶어도 이익될 것이 없고, 위하려 하나 위할 것도 없네. 배를 만들어야지. 이 산에 오래 머물지 말게."
이리하여 약산스님은 스님을 하직하였다.
스님의 강설
약산스님은 석두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로서, 석두, 마조 두 대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약산이 처음 석두스님을 만나 남방의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묻는다.
선 공부를 함에 있어서는 인과에 딱 들어맞는 알음알이와 분별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약산스님은 머리로 법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자세로 찾아와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물었으니, 석두스님은 제자가 분별을 여의도록 이끄는 중도의 답을 던져준다.
참된 스승이라면, 분별로 하는 세상의 모든 공부와는 완전히 다른 이 선의 깨달음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할 때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석두스님처럼 그 자리에서 제자의 분별심이 곧장 꽉 막혀버릴 수 있도록 답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둘이 아니면서 하나도 아닌 중도의 깨우침을 던져야 할 것이다.
꽉 막힌 채 마조스님을 찾아간 약산은 마침내 마조의 답에 한 소식을 얻게 된다. 석두와 마조의 바른 가르침이야말로 살활자재(殺活自在)이며, 파주(把住)와 방행(放行)의 방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뛰어난 중도적 안목을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이 두 스승의 살활자재한 가르침을 받고는 마침내 견처가 깊어진 약산에게, 마조는 그만 하직하고 떠나서 임운자재(任運自在)하게 인연 따라 법을 전하고 진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 것을 권한다.
27.
단하 천연스님이 두번째 스님을 참례하러 왔을 때였다. 아직 참례하기도 전에 바로 큰 방에 들어가 나한상의 목을 말타듯 타고 앉았다. 그러자 대중들이 경악하여 급히 스님께 아뢰었다. 스님께서 몸소 큰 방으로 들어가 그를 살펴보더니 말씀하셨다.
"천연한 내 아들이로군."
단하 스님은 즉시 땅으로 내려와 절하며, "대사께서 법호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였는데, 이 인연으로 '천연'이라 이름하였다.
스님의 강설
그 어떤 걸림도 없이 승방의 나한상의 목에 올라타 앉은 천연스러운 단하 천연스님이 보여주듯, 삶이란 이렇게 천연스럽게 본래 있는 그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내가 이 삶을 펼쳐나가기 위해 애써서 뭔가를 열심히 해야할 것은 없다. 이 삶은 그저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을 가만 살펴보면, '내'가 한다 하는 생각은 일어나지만, 실제로 삶에서 '내'가 하는 일은 없다. 그저 일어나고 있을 뿐.
28.
담주 혜랑스님이 처음 참례하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찾아와서 무엇을 구하느냐?"
"부처님의 지견을 구합니다."
"부처님에게는 지견이 없다. 지견은 마구니일 뿐이다. 그대는 어디서 왔느냐?"
"남악에서 왔습니다."
"그대가 남악에서 오긴 했으나 아직 조계의 심요를 모르는구나. 속히 그 곳으로 되돌아가야지, 다른 데로 가서는 안된다."
스님의 강설
부처님의 지견이란 무엇일까? 부처님의 지견이란, '지견 없음' 이다. 지견이 따로 없다는 것이 곧 불지견이다. 어떤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
불교 교리는 모두 지견으로서의 교리가 아니라 중생들의 분별을 깨트리기 위한 방편들인 것이다. 그러니 이 또한 살활자재함이다. 지견을 방편으로 쓰지만 또한 그 방편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그 방편도 궁극에는 깨트려주는 것이다.
마조는 담주 혜랑스님에게 이렇게 지견을 구하지도 말고, 더 이상 분별 속에서 헤매지도 말고 곧장 본래자리로 돌아가라고 일침을 가한다.
29.
스님께서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호남에서 왔습니다."
"동정호에는 물이 가득찼더냐?"
"아닙니다."
"때맞은 비가 그렇게나 내렸는데도 아직 가득 차지 않았더냐?"
도오스님은 "가득찼다." 하였고, 운암스님은 "담담하다." 하였으며, 동산은 "어느 겁엔들 모자란 적이 있었으랴." 하였다.
스님의 강설
마조스님의 질문의 뜻을 단박에 꿰뚫어내지 못한 이 스님은 매번 마조의 말을 따라가며 답을 한다. 이에 마조스님은 비가 그렇게나 내렸는데도 아직 동정호가 가득 차지 않았더냐며 답답해하는 듯 하다.
스승이 묻는 이 질문들은 깨달음의 공부를 묻고 있는 것이며, 곧바로 지금 여기서 본래의 자기 자리가 어떠한지를 묻고 있다.
여러분의 진짜 알맹이는 절대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이 부처님의 진짜 가르침은 안심법문이다. 왜 이 법의 진리가 안심법문일 수 밖에 없는지를 이제 여러분이 알아내셔야 한다. 계속 무엇인가를 얻고자 찾으며 추구하던 삶에서 벗어나 더 이상 찾을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 가벼운 편안함, 그 안심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한 여러분들이 아직 안심하지 못한듯 하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다. 안심해도 좋다. 아무 걱정말라는 것이다. 믿어도 된다.
그럼 뭘 믿어야 할까? 자기를 믿으라는 것이다. 저 바깥의 부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를 굳게 믿으라는 것이다. 이 몸이나 내 생각말고, 진짜 자기를 믿으라는 것이다.
배고플 때 배고픈 줄 알고, 아플 때 아픈 줄 아는, 모르겠다 하더라도 모르는 줄을 아는 그 자기 자성불. 그 진짜 자기를 굳게 믿고 맡기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완전히 안심해도 좋다.
- 법상스님의 마조어록 법문 말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