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37≫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1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괴로움들을 겪고 살며, 저마다 처한 괴로움들이 다 다르다. 그런데 그 각각의 괴로움의 원인은 하나 다르지 않다. 다 같다. 어떻게 해도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아무리 힘든 괴로움일지라도 근원에서 보았을 때 그 원인들은 다 한결같다.
그 괴로움의 공통적인 원인에 대해 우리가 바로 알고 자각하게 된다면 곧 그 괴로움의 문제는 해결된다. 괴로움을 알고 그 괴로움의 원인을 바르게 자각하여 그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그 과정이 곧 고집멸도 사성제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 괴로움은 12연기에서 생기며, 그 12연기를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곧 '허망한 착각'이다. 즉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우리의 허망한 착각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이 행복하다는 생각도, 불행하고 괴롭다는 생각도 모두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
많은 분들의 괴로움의 이야기를 상담을 통해 듣다 보면, 정말 많은 분들이 자기 스스로의 생각으로 지어낸 괴로움을 실제라고 굳게 믿고 스스로 그 괴로움에 빠져 힘들어 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그것은 생각일 뿐이라 말씀을 드려도 못 알아듣고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평생을 그 생각을 실제라고 믿으며 따라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해, 이렇게 성공해야 해, 나는 아프면 안돼, 나는 이것을 꼭 가져야 해...' 이러한 온갖 생각들을 자기가 다 만들어 놓고는, 이렇게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워하고 좌절하며 슬퍼한다. 다 생각에서 나온 일이 아닌가? 이 생각을 다 누가 만들었던가? 다 자기가 만든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그 생각을 만들어 놓고, 그 생각에 의미를 부여하여 중요도를 정해두고, 그 생각대로 되지않을 때 깊은 괴로움을 느낀다. 다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부여한 괴로움이라는 말이다. 외부에서 오는 괴로움이란 없다.

#2 괴로움의 공통구조에서 벗어나기 - 택법각지
생각을 내려놓는 것만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길이다. 이 생각을 붙잡은 것이 나라면, 놓을 수 있는 것 또한 나만이 할 수 있다. 나 뿐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은 다른 누가 아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내가 해결할 수 밖에 없다.
지금 뭔가 괴로운 일로 힘들어하고 계신다면... 그것들은 전부 실체가 아니라 생각이 만들어낸 일이라는 것을 빨리 자각하시기 바란다. 그리고는 무엇이 이렇게 괴로운가를 잘 지켜보시기를 바란다.
물론 그렇다고 힘든 괴로움이 단박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제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오직 법을 택하여 그 근원의 법자리에서 이 괴로움의 비실체성을 깨닫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다.

#3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접촉할 것인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생각으로 맞느냐 틀리느냐를 선택하게 되어있다. 이 생각이 옳으냐 저 생각이 옳으냐로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러나 마음공부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밝히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공부가 아니라 무분별지를 택하는 공부다. 즉 법을 택하는 공부다. 택함이 없이 택함을 말한다. 생각을 자유롭게 쓰긴 하되 생각을 믿지 않고 생각을 실제화시키지 않으므로 그 생각을 믿지 않는 길을 말한다. 제 3의 길이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우리는 세속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선택을 하고 살 수 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밝은 지혜의 안목으로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선택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으니 어떤 쪽이든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리고 아직 바른 지혜의 안목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면, 분별 망상이 큰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지혜로운 사람, 따뜻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을 가까이 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좋겠다.
자연을 가까이 하고 자연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이라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어떤 주변과 함께 하느냐는 나에게 참으로 중요한 일이 된다. 어떠한 촉입처를 만나는냐가 그래서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접촉하느냐에 따라 나의 의식이 자동으로 만들어져 나도 모르는 어떤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을 접촉하고 살 것이냐가 중요하다 하겠다.

#4 최악의 괴로움이 찾아왔더라도
도저히 방법이 없을 듯한 최악의 괴로움이 찾아왔더라도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근원적으로 '진짜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방법 밖에는 없다.
괴로운 '나'와 그 괴로움이 모두 실체가 아님을, 그러므로 둘이 아닌 하나임을 온전히 자각하고 나서는, 완전히 그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그 괴로움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과 하나되어 살아주는 것이다.
그 최악의 고통 앞에서 취사간택하여 싫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만 받아들이려 해 보았자 소용없을 것이다. 생각은 자꾸 거부하며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발버둥치고는 있으나, 실은 이미 그 상황 속에 들어가 있다. 이미 그것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미 그 괴로움과 하나가 되어 겪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러함을 인정하고 그 상황속으로 뛰어들어가 완전히 아파하며 그대로 겪어줄 때, 괴로움이 있으나 그 괴로움이 더 이상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이상 나에게 시비걸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좋은 삶 나쁜 삶이란 없다. 그냥 이렇게 매순간을 알아차림하는 눈앞의 삶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저 이렇게 있을 뿐이다.

#5 ≪마조어록37≫
석구스님이 처음 마조를 참례하자, 마조가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오구스님에게서 옵니다."
"오구스님은 요즘은 어떤 법문을 하던가?"
"여기서 몇 사람이나 아득해 어쩔 줄 몰라 쩔쩔맸을까?"
"아득함은 그만 두고, 고요한 한마디는 무엇이냐?"
석구가 이에 앞으로 세 걸음 다가가자 마조가 말했다.
"내가 너의 스승 오구를 일곱 방망이 때려야겠는데, 그대가 기꺼이 대신 해줄 수 있겠는가?"
석구가 말했다.
"스님께서 먼저 맞으시면, 제가 그 뒤에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오구로 돌아갔다.
<마조어록>중에서
스님의 강설
○
참례하고자 온 석구에게, 마조는 '스승 오구가 무슨 법문을 설하더냐' 하며 또 여지없이 법을 묻는 질문을 던진다. 곧장 법을 한 번 드러내어 보일 것을 청하는 질문이다.
이 마조의 질문이, 생각으로는 답을 낼 수 없을, 분별 이전의 법자리를 묻고 있음을 알고는 석구스님 역시 무분별지로 답한다.
이에 썩 만족한 마조는, 한 번 더 석구에게 분별을 쓰지말고 고요한 한 마디로 법을 일러 보라고 재차 물었고, 석구는 세 걸음으로 다가서며 여법하게 법을 또 드러내 보였다.
삼 세번의 질문과 답문이 있었으나, 이미 석구가 '여기서 몇 사람이나 쩔쩔맸을까' 했을 때부터 법은 여실하였다. 세 걸음을 다가갈 때도, 또 그 다음 답문에서도, 석구스님은 분별 이전의 지혜의 안목으로 법을 확연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
마조와 석구 간의 이러한 법거량에서 처럼, 눈밝은 선사들이 법을 거량함에 있어서는 이기고 지고가 따로 없으며 스승과 제자도 따로 없다. 구구절절한 말로 설명할 필요 또한 없다. 법의 자리에서는 이렇게든 저렇게든 그저 법을 드러내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이렇게 법거량을 주고 받기 그 이전 부터도 법은 여실하였으며, 그저 주고 받는 안부 인사에도, 나누는 차 한잔 속에도, 오가는 아무 일없는 대화 속에도 법은 늘 드러나 있다.
○
이와 같이 법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때도, 또한 이 스님이 매번 설하는 법문을 들을 때도, 여러분들은 말을 따라가서는 안될 것이다. 이 말을 따라가고 저 말을 따라가면서 말 뜻을 해석하고 좇아간다면 이미 틀렸다.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석구스님의 답에서도 또 이 스님의 법문 속에서도, 여러분들은 말을 듣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이 말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낙처를 올바로 간파해낼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곧장 드러난 법을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법상스님 말씀
9월 26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37≫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1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괴로움들을 겪고 살며, 저마다 처한 괴로움들이 다 다르다. 그런데 그 각각의 괴로움의 원인은 하나 다르지 않다. 다 같다. 어떻게 해도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아무리 힘든 괴로움일지라도 근원에서 보았을 때 그 원인들은 다 한결같다.
그 괴로움의 공통적인 원인에 대해 우리가 바로 알고 자각하게 된다면 곧 그 괴로움의 문제는 해결된다. 괴로움을 알고 그 괴로움의 원인을 바르게 자각하여 그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그 과정이 곧 고집멸도 사성제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 괴로움은 12연기에서 생기며, 그 12연기를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곧 '허망한 착각'이다. 즉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우리의 허망한 착각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이 행복하다는 생각도, 불행하고 괴롭다는 생각도 모두 자기가 만드는 것이다.
많은 분들의 괴로움의 이야기를 상담을 통해 듣다 보면, 정말 많은 분들이 자기 스스로의 생각으로 지어낸 괴로움을 실제라고 굳게 믿고 스스로 그 괴로움에 빠져 힘들어 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그것은 생각일 뿐이라 말씀을 드려도 못 알아듣고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평생을 그 생각을 실제라고 믿으며 따라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해, 이렇게 성공해야 해, 나는 아프면 안돼, 나는 이것을 꼭 가져야 해...' 이러한 온갖 생각들을 자기가 다 만들어 놓고는, 이렇게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워하고 좌절하며 슬퍼한다. 다 생각에서 나온 일이 아닌가? 이 생각을 다 누가 만들었던가? 다 자기가 만든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그 생각을 만들어 놓고, 그 생각에 의미를 부여하여 중요도를 정해두고, 그 생각대로 되지않을 때 깊은 괴로움을 느낀다. 다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부여한 괴로움이라는 말이다. 외부에서 오는 괴로움이란 없다.
#2 괴로움의 공통구조에서 벗어나기 - 택법각지
생각을 내려놓는 것만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길이다. 이 생각을 붙잡은 것이 나라면, 놓을 수 있는 것 또한 나만이 할 수 있다. 나 뿐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은 다른 누가 아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내가 해결할 수 밖에 없다.
지금 뭔가 괴로운 일로 힘들어하고 계신다면... 그것들은 전부 실체가 아니라 생각이 만들어낸 일이라는 것을 빨리 자각하시기 바란다. 그리고는 무엇이 이렇게 괴로운가를 잘 지켜보시기를 바란다.
물론 그렇다고 힘든 괴로움이 단박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제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오직 법을 택하여 그 근원의 법자리에서 이 괴로움의 비실체성을 깨닫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다.
#3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접촉할 것인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생각으로 맞느냐 틀리느냐를 선택하게 되어있다. 이 생각이 옳으냐 저 생각이 옳으냐로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러나 마음공부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밝히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공부가 아니라 무분별지를 택하는 공부다. 즉 법을 택하는 공부다. 택함이 없이 택함을 말한다. 생각을 자유롭게 쓰긴 하되 생각을 믿지 않고 생각을 실제화시키지 않으므로 그 생각을 믿지 않는 길을 말한다. 제 3의 길이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우리는 세속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선택을 하고 살 수 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밝은 지혜의 안목으로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선택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으니 어떤 쪽이든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리고 아직 바른 지혜의 안목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면, 분별 망상이 큰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지혜로운 사람, 따뜻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을 가까이 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좋겠다.
자연을 가까이 하고 자연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이라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어떤 주변과 함께 하느냐는 나에게 참으로 중요한 일이 된다. 어떠한 촉입처를 만나는냐가 그래서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접촉하느냐에 따라 나의 의식이 자동으로 만들어져 나도 모르는 어떤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을 접촉하고 살 것이냐가 중요하다 하겠다.
#4 최악의 괴로움이 찾아왔더라도
도저히 방법이 없을 듯한 최악의 괴로움이 찾아왔더라도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근원적으로 '진짜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방법 밖에는 없다.
괴로운 '나'와 그 괴로움이 모두 실체가 아님을, 그러므로 둘이 아닌 하나임을 온전히 자각하고 나서는, 완전히 그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그 괴로움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과 하나되어 살아주는 것이다.
그 최악의 고통 앞에서 취사간택하여 싫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만 받아들이려 해 보았자 소용없을 것이다. 생각은 자꾸 거부하며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발버둥치고는 있으나, 실은 이미 그 상황 속에 들어가 있다. 이미 그것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미 그 괴로움과 하나가 되어 겪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러함을 인정하고 그 상황속으로 뛰어들어가 완전히 아파하며 그대로 겪어줄 때, 괴로움이 있으나 그 괴로움이 더 이상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이상 나에게 시비걸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좋은 삶 나쁜 삶이란 없다. 그냥 이렇게 매순간을 알아차림하는 눈앞의 삶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저 이렇게 있을 뿐이다.
#5 ≪마조어록37≫
석구스님이 처음 마조를 참례하자, 마조가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오구스님에게서 옵니다."
"오구스님은 요즘은 어떤 법문을 하던가?"
"여기서 몇 사람이나 아득해 어쩔 줄 몰라 쩔쩔맸을까?"
"아득함은 그만 두고, 고요한 한마디는 무엇이냐?"
석구가 이에 앞으로 세 걸음 다가가자 마조가 말했다.
"내가 너의 스승 오구를 일곱 방망이 때려야겠는데, 그대가 기꺼이 대신 해줄 수 있겠는가?"
석구가 말했다.
"스님께서 먼저 맞으시면, 제가 그 뒤에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오구로 돌아갔다.
<마조어록>중에서
스님의 강설
○
참례하고자 온 석구에게, 마조는 '스승 오구가 무슨 법문을 설하더냐' 하며 또 여지없이 법을 묻는 질문을 던진다. 곧장 법을 한 번 드러내어 보일 것을 청하는 질문이다.
이 마조의 질문이, 생각으로는 답을 낼 수 없을, 분별 이전의 법자리를 묻고 있음을 알고는 석구스님 역시 무분별지로 답한다.
이에 썩 만족한 마조는, 한 번 더 석구에게 분별을 쓰지말고 고요한 한 마디로 법을 일러 보라고 재차 물었고, 석구는 세 걸음으로 다가서며 여법하게 법을 또 드러내 보였다.
삼 세번의 질문과 답문이 있었으나, 이미 석구가 '여기서 몇 사람이나 쩔쩔맸을까' 했을 때부터 법은 여실하였다. 세 걸음을 다가갈 때도, 또 그 다음 답문에서도, 석구스님은 분별 이전의 지혜의 안목으로 법을 확연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
마조와 석구 간의 이러한 법거량에서 처럼, 눈밝은 선사들이 법을 거량함에 있어서는 이기고 지고가 따로 없으며 스승과 제자도 따로 없다. 구구절절한 말로 설명할 필요 또한 없다. 법의 자리에서는 이렇게든 저렇게든 그저 법을 드러내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이렇게 법거량을 주고 받기 그 이전 부터도 법은 여실하였으며, 그저 주고 받는 안부 인사에도, 나누는 차 한잔 속에도, 오가는 아무 일없는 대화 속에도 법은 늘 드러나 있다.
○
이와 같이 법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때도, 또한 이 스님이 매번 설하는 법문을 들을 때도, 여러분들은 말을 따라가서는 안될 것이다. 이 말을 따라가고 저 말을 따라가면서 말 뜻을 해석하고 좇아간다면 이미 틀렸다. 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석구스님의 답에서도 또 이 스님의 법문 속에서도, 여러분들은 말을 듣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이 말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낙처를 올바로 간파해낼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곧장 드러난 법을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법상스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