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8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32≫ 이해하는 것과 깨닫는 것
#1 이해하는 공부 vs 깨닫는 공부
○
깨달음으로 가는 이 공부를 머리로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앞뒤를 맞추어 완벽하게 이해를 했으니 이제 알겠다 한다면... 이것은 잘하고 있는 공부가 아니다.
(죽비를 치시며) 이것이 법이라고 할 때, '스님이 죽비를 치신다' 하거나, '저 소리가 곧 법이로구나', 혹은 '저 소리와 내가 하나로구나' 하며 머릿 속으로 생각을 개입시키며 듣는다면 벌써 분별로 들어간 것이다. 벌써 틈이 벌어진 것이다. 제대로 법문을 듣고 제대로 이 소리를 듣고 있다면 '그저 모를 뿐'이 답일 것이다.
법문을 들을 때도 생각을 하며 분별을 개입시켜서는 안된다. 살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분별을 다 내려놓은 채, 순수하게 법의 자리에 임할 때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
그러니 때로 홀로 고요히 보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법문을 생각으로 끼워맞추며 듣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도 쉬며 그냥 있는 시간을 자주 가지는 것이 좋겠다. 아무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그냥 있을 때, 곧장 부처이다.
○
또한 대부분의 공부인들은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저마다 깨달음의 상을 지니고 있기가 쉽다. 그러나 이러한 법상을 쥐고 있다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러한 상에 맞추려고 애쓰며 공부를 할 것이며 그 상을 체험해야만 깨닫는 것이라 규정짓고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보니, 그것과 다른 식으로 진짜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해도 거부하거나 모른채 넘어가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법상을 버려야 한다.

#2 참된 자비와 사랑
○
보통 우리는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자비로운 행동을 하고 베푸는 것'을 자비라고 생각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자비는 그것이 아니다.
자비가 곧 지혜이며, 지혜가 곧 자비이다. 성품 자리를 깨닫고 나면, 이 몸이 내가 아니라 다함없이 툭트인 이 허공성 전체가 진정한 나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렇게 저 사람이 나와 다르지 않으며, 이 온 세상 전체가 나와 다르지 않은 하나임을 알게 되면 상을 내는 차별적 자비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저 사람에게 차별적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하나를 돕는 것이요, 내가 나를 돕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심이다.
이렇듯 진정한 '나'를 알아내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에 아파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미 일체중생이 일시에 모두 구제되어 있음을 곧장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일체중생의 구제가 본래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참된 자비란 이런 것이다.

#3 ≪마조어록32≫
마곡보철 선사가 하루는 마조를 모시고 길을 가다가 물었다.
"무엇이 대열반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급하다."
"무엇이 급하다는 말입니까?"
"물을 보아라."

스님의 강설
이러한 조사들의 선문답에는 정형화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조스님이 보철에게 급하다 했을 때, 그 말 뜻을 좇아가서는 안된다.
"급하다" 라는 답 속에는 어느 정도의 말뜻도 있겠지만, 그러나 첫 번째 자리에서의 본 뜻은 이 죽비소리와 다르지 않다. 이것이 곧 제일의제이다.
마조스님은 "급.하.다."에서 벌써 분별없이 이 법을 곧장 확인하도록 일러주신 것이며, 어떤 말로 답하더라도 이 법을 곧장 이르지 않는 말이 없음을 제자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것이다.
이렇게 선문답을 주고 받는 가운데, 제자의 욕심 없으되 간절한 발심과 스승의 반복된 가리킴의 지시가 딱 맞아떨어지는 어느 한 순간이 마침내 깨달음의 기연이 되는 것이다.

***
덧붙임
마조스님께서 급.하.다. 하시기 이전에
우리 스님께서 죽비를 딱! 치시기 이전에
그 어떠한 외마디 소리가 있기 그 이전부터
무어라 입 열어 말하기 그 이전부터
이미 늘 한결같이 엄연하게 본래 있어왔던...
바로 그 한 자리 소식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법상스님께 배웁니다
선향지 합장 올림

8월 8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32≫ 이해하는 것과 깨닫는 것
#1 이해하는 공부 vs 깨닫는 공부
○
깨달음으로 가는 이 공부를 머리로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앞뒤를 맞추어 완벽하게 이해를 했으니 이제 알겠다 한다면... 이것은 잘하고 있는 공부가 아니다.
(죽비를 치시며) 이것이 법이라고 할 때, '스님이 죽비를 치신다' 하거나, '저 소리가 곧 법이로구나', 혹은 '저 소리와 내가 하나로구나' 하며 머릿 속으로 생각을 개입시키며 듣는다면 벌써 분별로 들어간 것이다. 벌써 틈이 벌어진 것이다. 제대로 법문을 듣고 제대로 이 소리를 듣고 있다면 '그저 모를 뿐'이 답일 것이다.
법문을 들을 때도 생각을 하며 분별을 개입시켜서는 안된다. 살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분별을 다 내려놓은 채, 순수하게 법의 자리에 임할 때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
그러니 때로 홀로 고요히 보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법문을 생각으로 끼워맞추며 듣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도 쉬며 그냥 있는 시간을 자주 가지는 것이 좋겠다. 아무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그냥 있을 때, 곧장 부처이다.
○
또한 대부분의 공부인들은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저마다 깨달음의 상을 지니고 있기가 쉽다. 그러나 이러한 법상을 쥐고 있다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러한 상에 맞추려고 애쓰며 공부를 할 것이며 그 상을 체험해야만 깨닫는 것이라 규정짓고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보니, 그것과 다른 식으로 진짜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해도 거부하거나 모른채 넘어가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법상을 버려야 한다.
#2 참된 자비와 사랑
○
보통 우리는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자비로운 행동을 하고 베푸는 것'을 자비라고 생각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자비는 그것이 아니다.
자비가 곧 지혜이며, 지혜가 곧 자비이다. 성품 자리를 깨닫고 나면, 이 몸이 내가 아니라 다함없이 툭트인 이 허공성 전체가 진정한 나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렇게 저 사람이 나와 다르지 않으며, 이 온 세상 전체가 나와 다르지 않은 하나임을 알게 되면 상을 내는 차별적 자비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저 사람에게 차별적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하나를 돕는 것이요, 내가 나를 돕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심이다.
이렇듯 진정한 '나'를 알아내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에 아파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미 일체중생이 일시에 모두 구제되어 있음을 곧장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일체중생의 구제가 본래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참된 자비란 이런 것이다.
#3 ≪마조어록32≫
마곡보철 선사가 하루는 마조를 모시고 길을 가다가 물었다.
"무엇이 대열반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급하다."
"무엇이 급하다는 말입니까?"
"물을 보아라."
스님의 강설
이러한 조사들의 선문답에는 정형화된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조스님이 보철에게 급하다 했을 때, 그 말 뜻을 좇아가서는 안된다.
"급하다" 라는 답 속에는 어느 정도의 말뜻도 있겠지만, 그러나 첫 번째 자리에서의 본 뜻은 이 죽비소리와 다르지 않다. 이것이 곧 제일의제이다.
마조스님은 "급.하.다."에서 벌써 분별없이 이 법을 곧장 확인하도록 일러주신 것이며, 어떤 말로 답하더라도 이 법을 곧장 이르지 않는 말이 없음을 제자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것이다.
이렇게 선문답을 주고 받는 가운데, 제자의 욕심 없으되 간절한 발심과 스승의 반복된 가리킴의 지시가 딱 맞아떨어지는 어느 한 순간이 마침내 깨달음의 기연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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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마조스님께서 급.하.다. 하시기 이전에
우리 스님께서 죽비를 딱! 치시기 이전에
그 어떠한 외마디 소리가 있기 그 이전부터
무어라 입 열어 말하기 그 이전부터
이미 늘 한결같이 엄연하게 본래 있어왔던...
바로 그 한 자리 소식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법상스님께 배웁니다
선향지 합장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