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 15》 상당 시중 중에서
I.
비유하면, 달그림자는 여럿이지만 달 자체는 하나이고, 물의 갈래는 여럿이지만 물은 하나뿐이며, 삼라만상은 여럿이지만 허공은 하나이고, 도리를 말하는 것은 여럿이나 걸림없는 지혜는 하나뿐임과 같다.
이런 갖가지로 세워진 것들이 모두 일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세워도 좋고 쓸어버려도 좋다.
모두가 오묘한 작용이며 모두가 자기의 일이다.

스님의 강설
분별을 따라가면 내 인생에도 시시비비와 흥망성쇠가 있고 이러한 좋고 나쁜 모든 것들에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온갖 세상이 모두 실상인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이렇게 분별을 하며 성공을 추구하며 산다면, 이 추구심에는 끝이 없다.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추구하느라, 분별의 세계속에서 행복하기란 불가능이다.
이 법의 진실은 무상과 무아다. 이 무상과 무아를 온전히 허용할 때 열반적정이 드러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분별에서 벗어나 이 열반적정의 자리에 온전히 발딛고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이미 드러나 있는, 저마다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살면 된다. 이렇게 그저 살고 있는 이것에 좋고 나쁘고가 없다면 그대로 실상이요 진리다.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언제나 늘 있어왔던 이것이었음을 알면 된다.
그 다음부터는 내 이름이 붙여진 '나'라는 이 몸은 저절로 알아서 살려지고 있음을 알고 그저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갖가지로 세워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이 한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세워도 좋고 쓸어버려도 좋다. 어차피 꿈으로 허망하게 세워진 것일 뿐임을 안다면 이 세상의 분별된 모든 일들은 무슨 일이든 해도 좋고, 다 쓸어버려도 된다. 세우고 쓸어버리는 이 일들은 모두 허망한 허상일 뿐이니, 어디에도 특정하게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할 정해진 길은 없기 때문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일들의 바탕에 있는 진짜 오묘한 진리의 작용들을 알아내야 한다. 이 근원적인 것을 알아내야 한다.
이 법은 오로지 '식'일 뿐이지만,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육식도 칠식인 말나식도 팔식인 아뢰야식도 진짜 법은 아니다. 이러한 '식'의 작용들은 대상화 작용을 포함하므로 자체가 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전식득지(轉識得智)라 한다. 모든 '식'이 변화되어서 지혜로 바뀐다는 것이다. 대상화가 없는 알아차림이다. 하나가 하나를,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리는, 법이 법을 보는 알아차림이다.
궁극에는 챙길 법도 따로 없지만 또 그렇다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유무중도(有無中道). 이 자리는 유有와 무無를 모두 벗어난 자리다(非有非無). 또한 세속제인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자리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있다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고, 안도 밖도 따로 없는 오묘한 작용이라 하는 것이며, 모두가 하나인 자기의 일일 뿐이다.
불이법인 이 하나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분별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자리를 알아내는 이 공부 하나에 모두 달려있다.
***
참고 - 유식불교의 '식'
제6식
객관적 만유(萬有)의 대상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인 육경(六境)으로 하고 육경에 대하여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닿고, 알고 하는 인식작용(認識作用)
제7식 말나식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끊임없이 자아(自我)라고 오인하여 집착(執著)하고, 아뢰야식과 육식(六識)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육식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 자아집착식
제8식 아뢰야식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근본 의식(意識)이다. 과거의 인식·행위·경험·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 의식으로 종자와 5근(根), 3경(境)을 분별, 윤회(輪廻)와 근본(根本)이 되며, 근본 식이라고 한다. 이숙식. 일체종자식.

II.
진리를 떠나서는 설 곳이 없으니 서 있는 곳이 바로 진리이며, 모두가 자신의 본바탕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자라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스님의 강설
입처직진(立處直眞 - 서 있는 이 자리가 곧장 진리의 자리)이다. 우리는 진리를 떠나서 진리 아닌 다른 곳에 단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곧 진리의 자리다. 진리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증명되고 있다.
이렇게 진리의 자리에서 온갖 모양이 다 드러나 보이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드러나 보이는 이 바탕이 곧 우리의 본 바탕이다.
***
덧붙임
행행본처 지지발처(行行本處 至至發處)입니다. 가도 가도 여기 이 곳입니다. 어디서 왔더라도 여기이며 어디로 가더라도 여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디로 간 바도 없고 어디서 온 바도 없습니다. 여기서 한 발도 움직인 바가 없습니다.
찾아도 찾아도 결국 여기 이대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자리에서 한 발도 뗀 적 없이 늘 여기서 진리를 쓰며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눈앞을 살 뿐입니다. 이 자리 이 한 소식만 알아내면 된다 하십니다.
법상스님께 배우는 공부인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그림 - 목탁소리 유호란 법우님 작품
4월 11일 일요법회 법문말씀
《마조어록 15》 상당 시중 중에서
I.
비유하면, 달그림자는 여럿이지만 달 자체는 하나이고, 물의 갈래는 여럿이지만 물은 하나뿐이며, 삼라만상은 여럿이지만 허공은 하나이고, 도리를 말하는 것은 여럿이나 걸림없는 지혜는 하나뿐임과 같다.
이런 갖가지로 세워진 것들이 모두 일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세워도 좋고 쓸어버려도 좋다.
모두가 오묘한 작용이며 모두가 자기의 일이다.
스님의 강설
분별을 따라가면 내 인생에도 시시비비와 흥망성쇠가 있고 이러한 좋고 나쁜 모든 것들에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온갖 세상이 모두 실상인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이렇게 분별을 하며 성공을 추구하며 산다면, 이 추구심에는 끝이 없다.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추구하느라, 분별의 세계속에서 행복하기란 불가능이다.
이 법의 진실은 무상과 무아다. 이 무상과 무아를 온전히 허용할 때 열반적정이 드러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분별에서 벗어나 이 열반적정의 자리에 온전히 발딛고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이미 드러나 있는, 저마다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살면 된다. 이렇게 그저 살고 있는 이것에 좋고 나쁘고가 없다면 그대로 실상이요 진리다.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언제나 늘 있어왔던 이것이었음을 알면 된다.
그 다음부터는 내 이름이 붙여진 '나'라는 이 몸은 저절로 알아서 살려지고 있음을 알고 그저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갖가지로 세워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이 한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세워도 좋고 쓸어버려도 좋다. 어차피 꿈으로 허망하게 세워진 것일 뿐임을 안다면 이 세상의 분별된 모든 일들은 무슨 일이든 해도 좋고, 다 쓸어버려도 된다. 세우고 쓸어버리는 이 일들은 모두 허망한 허상일 뿐이니, 어디에도 특정하게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할 정해진 길은 없기 때문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일들의 바탕에 있는 진짜 오묘한 진리의 작용들을 알아내야 한다. 이 근원적인 것을 알아내야 한다.
이 법은 오로지 '식'일 뿐이지만,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육식도 칠식인 말나식도 팔식인 아뢰야식도 진짜 법은 아니다. 이러한 '식'의 작용들은 대상화 작용을 포함하므로 자체가 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전식득지(轉識得智)라 한다. 모든 '식'이 변화되어서 지혜로 바뀐다는 것이다. 대상화가 없는 알아차림이다. 하나가 하나를, 자기가 자기를 알아차리는, 법이 법을 보는 알아차림이다.
궁극에는 챙길 법도 따로 없지만 또 그렇다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유무중도(有無中道). 이 자리는 유有와 무無를 모두 벗어난 자리다(非有非無). 또한 세속제인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자리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있다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고, 안도 밖도 따로 없는 오묘한 작용이라 하는 것이며, 모두가 하나인 자기의 일일 뿐이다.
불이법인 이 하나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분별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자리를 알아내는 이 공부 하나에 모두 달려있다.
***
참고 - 유식불교의 '식'
제6식
객관적 만유(萬有)의 대상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인 육경(六境)으로 하고 육경에 대하여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닿고, 알고 하는 인식작용(認識作用)
제7식 말나식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끊임없이 자아(自我)라고 오인하여 집착(執著)하고, 아뢰야식과 육식(六識)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육식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 자아집착식
제8식 아뢰야식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근본 의식(意識)이다. 과거의 인식·행위·경험·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 의식으로 종자와 5근(根), 3경(境)을 분별, 윤회(輪廻)와 근본(根本)이 되며, 근본 식이라고 한다. 이숙식. 일체종자식.
II.
진리를 떠나서는 설 곳이 없으니 서 있는 곳이 바로 진리이며, 모두가 자신의 본바탕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자라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스님의 강설
입처직진(立處直眞 - 서 있는 이 자리가 곧장 진리의 자리)이다. 우리는 진리를 떠나서 진리 아닌 다른 곳에 단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곧 진리의 자리다. 진리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증명되고 있다.
이렇게 진리의 자리에서 온갖 모양이 다 드러나 보이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드러나 보이는 이 바탕이 곧 우리의 본 바탕이다.
***
덧붙임
행행본처 지지발처(行行本處 至至發處)입니다. 가도 가도 여기 이 곳입니다. 어디서 왔더라도 여기이며 어디로 가더라도 여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디로 간 바도 없고 어디서 온 바도 없습니다. 여기서 한 발도 움직인 바가 없습니다.
찾아도 찾아도 결국 여기 이대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자리에서 한 발도 뗀 적 없이 늘 여기서 진리를 쓰며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눈앞을 살 뿐입니다. 이 자리 이 한 소식만 알아내면 된다 하십니다.
법상스님께 배우는 공부인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그림 - 목탁소리 유호란 법우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