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202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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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조현이만난사람 

“세상은 마음의 투영…좋은 삶의 시작은 좋은 생각이다”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⑦ ‘목탁소리’ 운영자 법상 스님

접촉은 줄고, 접속은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해 활동량과 대면 접촉이 줄면서 활동 반경은 줄고, 불안과 우울 지수는 높아졌다. 코로나19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 못지않게 지나친 불안과 우울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한 때다. 똑같은 환경이지만 평안하고 행복한 일상을 누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지혜를 찾아 <한겨레>가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시리즈를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일곱번째 멘토는 인터넷 마음공부공동체 ‘목탁소리’ 운영자 법상 스님(46)이다.

법상 스님, 사진 조현 기자

티브이(TV)와 유튜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켜면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가 건물을 사고, 한강뷰 아파트나 단독주택에 살고, 또 어떤 젊은이는 주식과 비트코인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신화들로 가득하다. 그런 화려한 성공의 그늘에서 ‘나는 뭐 하고 있는가’라는 좌절과 우울의 그림자가 스며든다. 이 화려한 우울 시대를 건너기 위해 이번엔 불교적 마음건강법 전수자 법상 스님을 지난 11일 서울 인사동 플라톤아카데미에서 만났다.


법상 스님은 20년 넘게 군승으로 군대에서 젊은이들과 지냈다. 군대에선 초코파이나 먹으려고 법회에 참석하는 군인들과도 소통하기 위해 좀 더 알기 쉬운 방법들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도 불법뿐 아니라 성격검사와 에니어그램, 심리학, 뉴에이지 등 온갖 프로그램들을 섭렵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법문에선 그런 방편들을 찾아볼 수 없다. 철저히 선(禪)과 불교의 본질로만 소통하는 정공법을 쓰고 있다. 군승 예편 뒤 부산 대원정사 주지로 있지만, 절에서 불공도 기도도 권하지 않은 채 그는 주로 유튜브 법문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그간 불교 법문들은 뭔가 깊이는 있는데 너무나 어렵다는 대중의 인상평이 많았다. 그런데 법상 스님이 이를 깨는 선구자 구실을 하고 있다. 양념을 치지 않은 정공법 법문임에도 유튜브 채널 ‘법상 스님의 목탁소리’가 회원수 10만명을 넘어섰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법륜 스님의 사제이기도 한 법상 스님은 불교계의 신성이다. <붓다 수업> <반야심경과 선 공부> <선어록과 마음공부> 등 그가 쓴 10여권의 책들도 선과 마음공부를 하려는 이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다.


일반인들이 불교를 접할 때 불교의 핵심 진리, 즉 ‘내가 없다’는 무아에서부터 막힌다. 이토톡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고 생각하고 말하는 나를 왜 없다고 할까.


“무조건 ‘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정된 실체로서 내가 없다는 것이다. 20년 전 몸의 세포는 다 죽고 전혀 다른 세포로 채워졌는데 20년 전 몸도 나라고 하고, 20년 후 몸도 나라고 한다. 아이 때 생각은 사라지고 다르게 생각하고 계속 변하는데도 내 생각이라고 한다.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아상, 아집, 아만, 아견이 사라지면 과도한 긴장이나 욕망, 집착이 사라지고 편안하게 산다. 몸뿐 아니라 생각이나 감정, 의지도 흘러감을 알아 내 것이라고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처럼 무아의 진리를 알면 부부와 부자와 동료가 생각이 다를지라도 그건 그것대로 인정할 뿐,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맞다거나 틀렸다고 분별하고, 차별하고,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지하는 대선 주자나 이념에 대해 생각이 달라도 특정 생각을 동일시하며 발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의 첫번째 진리인 ‘무상’에 대해 사람들이 ‘인생무상’이라거나 허무주의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역으로 설명한다. 오히려 무상해 변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병든 사람은 건강을 되찾을 수 있고, 악한 사람이 착하게 발심할 수 있으며, 지금은 가난한 사람이 다시 부귀를 누릴 수도 있고,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운명을 무상하지 않고 고정된 것으로 믿어 사주를 보는 것도 그는 경계한다.


“전생의 업을 그대로 받을 것이니 이번 생은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절대 그 업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업이란 말과 행동, 생각으로 하는 행위다. 행위에 따라 미래가 바뀌니 우리 삶은 끊임없이 그 궤도를 수정해나간다. 불교는 과거의 업이나 미래가 아니라, 언제나 매 순간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에 어떤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삶은 매 순간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돈에 대해서도 그는 금기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붓다는 왕에겐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정치인에겐 정치하는 법을, 장사하는 이에겐 돈을 잘 버는 법을 적절하게 법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심히 돈을 벌되, 괴로움을 가져오지 않도록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불교의 인과법의 비밀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는 “시간은 직선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과거·현재·미래도 다만 관념일 뿐 모두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에, 설사 좀 부족하더라도 먼저 여유와 감사의 마음을 지닐 때 그 원인이 만들어져 더 풍요로워진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먼저 결과를 만들면 원인이 뒤따를 수 있다는 의미는?


“시간은 환상이며 신기루에 불과하다. 먼저 즉각적으로 결과를 만들어내면 우주법계는 그 원인을 뒤이어 제공해준다. 미래를 위해 삶을 희생한다며 궁핍한 마음으로 집착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것에 감사하고 여유를 가질 때 더욱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상황이 나아지기 전에 먼저 좋은 생각, 좋은 느낌, 좋은 감정을 가지면 상황도 좋아질 수 있나?


“그렇다. 미국 하버드대 엘런 랭어 교수가 호텔 청소부들을 절반만 따로 불러 호텔 청소 활동의 운동 효과를 들려주었다. 시트 가는 데 40칼로리 소모, 청소기 돌리는 데 50칼로리 소모라고 했더니 이들은 한달 후 체중·허리둘레·지방·혈압이 감소해 몸이 건강해졌지만, 나머지 절반은 변화가 없었고, 고역이라 여기며 일한 사람들일수록 피로의 독소가 증가했다고 한다. 같은 일을 해도 어떤 느낌, 어떤 감정으로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불교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을 중시하지 않나?


“외부적인 세계인 바깥 경계는 자기 마음의 투영이다. 내 마음이 세계를 규정지어 메타버스 같은 세계를 만들어내 그 속에 갇혀 살아간다. 세상은 내 뜻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있고, 못 바꾸는 것도 있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외부 경계에 좌우되지 않고 내면이 주인이 되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현대인은 불안과 두려움이 많은데 이를 어떻게 극복하나?


“내가 있으면 두렵다. 내가 세상을 산다고 하면, 나와 나 아닌 것을 나누어, 나 아닌 것이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남보다 더 잘 살아야 할 것 같다. 노후가 두렵고, 집값이 떨어질까봐, 몸에 병이 날까봐 두렵다. 근원적으로 해결되는 방법은, 세상 따로 나 따로인 줄 알았는데. 마음공부로 깨달아 오직 통으로 하나이고, 나뿐임을 안다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법상 스님, 사진 조현 기자



―어떻게 욕망을 극복할 수 있나?


“꿈을 보자. 꿈속에 등장하는 것 모두는 내 의식이 만들어낸 것이다. 꿈속에 있을 때는 꿈속 등장인물이 전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방금 꿈속에서 창조됐다는 것을 모른다. 실은 꿈 전체가 나다. 전체가 하나인 나다. 그 안에 있을 때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른다. 그러나 꿈에서 깨면, 실제가 아니라 허망한 꿈이었음을 안다. 꿈과 현실이 똑같다. 그걸 자각하는 게, 일체가 ‘공(空)함’을 아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다. 나를 오해하면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 진실을 깨닫는 것만이 근원적인 답을 줄 수 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핵심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기존 삶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라고 한 것이다. 그 의미는?


“누구나 나라는 아상(我相)을 세워놓고, 어떻게 하면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남보다 앞서 살 수 있을까, 남보다 더 많이 돈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아간다. 우리들 삶의 바탕에는 언제나 나라는 아상이 있다. 일체중생을 위한 연민과 자비의 마음이 바탕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아상과 이기심이 중심이 되어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아상 중심, 나 중심의 삶의 방향을 일체중생을 향한 삶의 방향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에서 가장 큰 위기라고 느낀 역경은?


“스님들보다 공부를 많이 한 불자들을 만날 때 위기를 느꼈다. 내가 이러고도 수행자냐는 자극이 왔다. 그렇게 분심이 나고 정신을 번쩍 나게 한 그분들 덕에 공부를 했다. 수십년 전만 해도 깨달음이란 너무 막연하고, 극소수만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깨어남의 시대다. 누구나 유튜브만 듣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불교는 인과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실에선 운도 따라야지 노력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고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도 있는데, 어떤가?


“수많은 인연의 결과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내맡기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좋다. 지금 좋지 않아 보이는 일이 뒷날 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는 게 삶이다. 만약 꿈을 이루지 못했다면 좌절하라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배움과 성숙을 이뤄야 한다.”


―내 뜻대로 되면 즐겁다고 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괴롭다고 하는데,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모든 괴로움은 바로 집착에서 온다. 고가 타파된 영원한 즐거움에 이르려면 바로 집착을 놓아버리면 된다. 집착을 놓아버리려면 먼저 내가 집착하고 있던 것들, 바로 집착의 대상이 그다지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이 되면 가능해질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거기엔 어떤 실체적인 것은 없다. 다 착각이다. 괴로워도 괜찮다. 우주법계는 다양한 삶의 괴로움들을 통해 우리를 깨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이 생기는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당신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괴로움만 없애면 행복해진다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는 게 삶이라는 시나리오다.”


―깨달음의 대중화를 말한 이유는?


“유튜브를 하고 많은 분들을 만나다 보니,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도 마음 속 의문을 풀기 위해 찾고 찾아보다가 자기 성품을 확인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하나의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깨달음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스님들처럼 열심히 갈고 닦아도 못 깨달으니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냐고 생각했지만, 이제 깨달음이라는 게 세계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기독교·천주교 신자들도 법문을 듣다가 문득 ‘아, 바로 이거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성경을 훤히 알겠다고 한다.”


―깨달았다며 도인 행세를 하는 이들도 많은데, 이를 어떻게 보나?


“자기 성품을 보는 것, 즉 돈오와 견성은 이제 입문한 것이다. 성철 스님이 동중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를 말씀하신 것도 그것 자체가 진리여서가 아니라 언듯 성품을 본 것 가지고 도인 행세를 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성품 자리를 확인해도 습의 문제는 남는다. 여전히 화가 나고, 욕심이 일어날 수 있다. 깨달음이란 자기 성품을 보는 것인데, 자기 성품은 특수한 몇몇만 가지는 게 아니라 천하 모든 이가 갖추고 있기에 특별할 게 없고, 내가 높다는 상(相)이 생길래야 생길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특별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면 그것이 사이비, 외도의 증거다. 평상심이 도라고 했다. 그들은 견성했다 하더라도 퇴보하고 만다. 견성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 자리에서 하던 일을 하면서 살아가되, 다만 끄달림이 없이 좀 더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견성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꾸준히 공부해 습을 조복 받고 푹 익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변화와 성장을 위해 어느 정도 노력해야 하나?


“외부적인 상황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만 어느 부분은 바꿀 수 있고, 어느 부분은 바꿀 수 없을 수 있다. 그러니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다. 부처님은 누군가에게 바꾸도록 3번을 권했는데도 바뀌지 않으면 그냥 받아들였다. 노력해도 안될 인연이라면 빨리 포기하는 게 낫다. 어떤 보살님들이 남편이 술 먹는 것 때문에 화가 치밀어, 아무 소용 없는 것을 30년 동안 계속 하기도 한다. 과도하게 집착하면 폭력이 된다. 이거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은 스스로도 괴롭고, 남들도 힘들게 한다.”


―정치 판도, 좌우 이념적인 대립에 있어서도 왜 이렇게 같은 사회, 같은 세상을 두고도 마치 딴세상처럼 다르게 볼까?


“세상은 나에게 이해된 세상일 뿐이다. 외부에 있는 것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대상들을 자기 식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인식론의 특징이다. 우리에게 감각되고 지각되어 분별된 세계만을 일체, 즉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수많은 대상들 가운데 어떤 특별한 대상들만을 선택적으로 취사선택해서 좋아하고 싫어할 것이냐 하는 점에 따라 나와 세계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 100명이 있다면 100명이 느끼는 세계는 전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즉 진짜가 있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착각의 세계, 허망한 분별의 세계, 마음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곧 일체는 마음이 만들어낸 허망한 착각의 세계일 뿐이다. 우리가 세상을 아는 방식은 분별이다. 남자만 홀로 살면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른다. 같이 있을 때 둘을 비교해야만 알아차린다. 그것이 인간의 분별지다. 분별 망상이 아닌 반야 지혜만이 대립을 넘어설 수 있는 근원의 지혜다.”


―통상 번뇌 망상도 마음이라고 하고, 불성 본성도 마음이라 하는데,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음이란 무엇이고, 마음을 본다고 할 때 어떻게 보는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인가?


“어느 곳에선 중생의 마음, 어느 곳에선 부처의 마음을 말한다. 대승기신론에선 일심을 진여심과 생멸심으로 나눈다. 분별심은 중생의 마음이고 생멸심은 둘로 나누는 분별심이다. 우리는 나와 너, 이렇게 나누어 분별해서 보지만, 진실의 측면에서 보면 전체가 통으로 둘이 아닌 하나다. 중생은 허망한 분별을 일으켜 어떤 대상을 보자마자 좋다거나 싫다고 분별하고, 좋은 것은 집착하고, 싫은 것은 밀어내고, 좋은 것은 취하려 하다가 안되면 화낸다. 자기 망상을 자각하면 분별에 속지 않는다. 분별을 해서 쓰긴 쓰지만, 근원적으로 묶여 있지는 않는다. 묶이지 않은 무분별지를 깨닫고 보면 파사현정을 해 삿된 것을 깨뜨리고, 바른 것이 본래대로 드러난다.”


―스님은 사실 불교엔 수행이 필요없다고 했는데, 무슨 말인가?


“모든 수행법들은 다양한 근기의 중생들을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 수행법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수행법 자체에 사로잡히거나 집착하여, 그 수행법만이 최고라고 집착하거나, 그 수행이 아닌 다른 수행을 폄하해서도 안 된다. 수행은 수행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한 방편일 뿐, 결국에는 버려할 것일 뿐이다. 사실은 이 언덕이 그대로 저 언덕이다. 참된 수행이란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눈뜨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의 내가 그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일 뿐이지, 또 다른 부처라는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실은 수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라는 자각, 눈뜸, 확인이 필요할 뿐이다.”


―스님도 불교 수행뿐 아니라 심신수련법, 애니어그램, 뉴에이지, 심리학 등 안해본 프로그램이 없을 정도라는데 불교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들도 각기 장점을 가지고 있다. 도움도 되었다. 수많은 영적 전통은 본성을 언뜻언뜻 보거나, 왔다갔다 하거나, 살짝만 맛보게 했다. 불교에서 본성을 보는 견성은 입문일 뿐이다. 그 이후의 공부가 중요하다. 선(禪)과 불교는 깨달음뿐 아니라 그 이후 보임 수행까지 완벽한 교화서인 조사어록과 임상결과를 완벽하게 구비한 ‘깨달음 시스템’, ‘진리 시스템’, ‘완전한 행복 프로그램’, ‘고의 소멸 체험학교’다.”


―통상 상구보리와 하와중생을 따로 보기도 하고, 수행 따로, 자비 실천행을 따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가?


“사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나 아닌 나 밖의 수많은 존재들의 도움과 인연과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면, 연기의 이치를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나 아닌 존재들, 즉 일체중생들을 모두 완전한 행복,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산다. 금강경의 핵심은 아상타파에 있다. 그동안 나를 중심으로 삶을 살아왔지만 나라는 상을 깸과 동시에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동체대비의 자각이 있게 되고, 일체중생을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근원적 행복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깨닫도록 이끄는 것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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