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의 주역, 상인] 4. 붓다는 왜 부자로 살라고 했나?
기자명 법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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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오신날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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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4.05.13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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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 2024.05.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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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수 1729
부에 대한 집착 없이 능동적으로 돈 버는 중도적 부자 지향
재가불자에게 ‘열심히 노력해 부자 돼라’ 여러 경전서 반복
소유 부정하지 않고, 무소유만 취하지 않는 무분별지 강조
불교, ‘무소유·가난의 종교’라는 오해 벗어나 자유자재해야
불교는 농업사회에서 상업사회로 전환되던 격변기에 등장한 상업 기반 종교다. 맹목적으로 무소유의 종교로만 봐왔지만 사실 불교는 부자와 가난 어느 양변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부자’ ‘상인’ ‘경제활동’ ‘돈’ 등의 키워드는 불교와는 동떨어진 주제일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정말 그럴까?
세계종교 가운데 유교 등은 농업 기반의 종교이고,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은 유목 기반의 종교인 데 반해, 불교는 농업사회에서 상업사회로 전환되던 그 격변기에 등장한 상업 기반의 종교다. 불교는 파사현정(破邪顯正)과 혁신성, 머무는 바 없이 무상한 변화에 적응하며, 고정되지 않고 활짝 열려 있는 종교라는 점 등에서 현대 사회와 같은 급변하는 시대에 매우 잘 맞는 종교이다.
인도 사회에서 사성 계급 가운데 평민이었던 바이샤 계급의 상인이 상업을 기반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사회 전면에 등장했으며, 이 부자들이 주목했던 종교도 역시 불교였다. 불교 최초의 사원도 장자라 불리는 이 상인들이 기부한 땅에 왕이 건물을 지어 창건되었으며, 스님들은 무역 상인들을 따라 낮에는 함께 이동했고, 밤에는 설법하며 상인들과 상부상조하면서 전법을 이어나갔다. 불교야말로 급변하는 상업 사회, 경제사회에 기반을 둔 종교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불교를 고리타분하고 형식적이며 무소유만 강조하는 종교로 오해했을까? 한국 사회에서 불교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틀은 ‘무소유’의 필터가 매우 강했다고 본다. 심지어 스님이 아닌 재가불자조차도 돈과 부자와 경제력을 좇아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돈을 벌고, 경제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정말 욕망이기만 한 것일까? 부자가 되는 것은 불교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일까? 불교는 돈과 경제활동을 부정했을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별역잡아함경’의 ‘사치하지도 너무 검소하지도 않고 그 중도를 취해야 한다’라는 말이나, ‘잡아함경’의 ‘어떤 선남자는 재물이 풍부하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며, 굶어 죽는 개와 같다고 한다’라는 것에서도 사치와 인색, 부와 가난 어느 양변에도 치우치지 않는 면모를 볼 수 있다.
맹목적으로 불교의 이미지를 무소유의 종교로만 보아왔지만, 사실 불교는 소유와 무소유, 부자와 가난 어디에도 치우침 없으면서도 인연 따라 부자도 쓸 수 있고 가난도 쓰는 자유자재한 가르침이다.
오히려 부처님은 재가자들에게는 더없이 열심히 노력하여 ‘부자가 돼라’ ‘돈을 벌라’라고 말했다. ‘별역잡아함경’에서는 ‘벌이 온갖 꽃을 채집하듯 밤낮으로 재물을 얻으라’고 했고, ‘증일아함경’에서는 ‘재물을 현재에 가지면 한량없는 복을 얻을 것’이라 했으며, ‘중아함경’에서는 ‘마땅히 먼저 기예를 익혀라. 그래야만 재물을 얻게 된다’고 했다. 또한 ‘잡아함경’에서는 ‘저 늙은 부부가 젊었을 때 건강한 몸으로 부지런히 재물을 구했더라면 슈라바스티 성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고, ‘중아함경’에서는 ‘능히 자기도 기르고 부모, 처자, 노비, 하인들도 안온하게 하라’라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까? 어떤 마음으로 부자가 되어야 할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란 과연 무엇일까?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즉 돈에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 없이 돈을 벌고자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적인 부자다. 돈에 집착하며 돈을 벌면 괴롭다. 못 벌면 어쩌지 해서 괴롭고, 있어도 더 벌고 싶어서 괴롭고, 미래를 위해 더 많은 돈을 준비해야 해서 괴롭다. 그러나 부자라는 결과에 집착 없이 번다면, 벌면 벌어서 좋고, 못 벌면 못 벌어도 좋다. 원하되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지금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과도하게 원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결과에 상관없이 매 순간 부자로 사는 길이다. 여기에는 순수한 경제활동에 대한 열정이 있지만, 집착과 그로 인한 괴로움이 없다.
돈에 집착이 없으면 게으를 것이란 생각은 편견에 불과하다. 집착 없이 행할 때 방일하지 않게 오히려 순수한 열정으로 행한다. 사실은 집착하고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수동적인 삶이다. 집착하는 그것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집착과 추구를 내려놓으면 전체를 향해 완전히 열린다. 무한 가능성을 향해 최선을 다한다. 부자를 집착하는 대신, 선호한다. 그럴 때 두려움 없이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게 된다. 하되 함이 없이 할 때, 그 함에 무위의 진정한 힘이 붙는다.
불교의 중도는 그 어떤 것도 취사간택하지 않는다. 취부득사부득(取不得 捨不得),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다. 소유를 버리지도 않고, 무소유만을 취하지도 않는다. 인연 따라 소유도 쓰고, 무소유도 쓸 뿐이지만,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사실 불교에는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정하는 것도 없고, 주장하는 바도 없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견해를 깨뜨릴 뿐이다. 부자에 치우쳐 집착하는 사람에게 그 사로잡힌 욕망을 깨주듯, 무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깨뜨린다.
제법실상(諸法實相), 현실이 곧 진실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며,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다. 현실인 이곳이 곧 불국토다. 현실의 괴로움만 제거하면 본래 현실이라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것이 불교의 총정리 교리인 사성제(四聖諦)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면 괴로움의 소멸이 곧 해탈이고 열반이다. 괴로움의 제거를 위해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설할 뿐이다.
무엇이 괴로움인가? 돈을 더 벌기를 원하는 마음이 나를 괴롭게 한다. 그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집착을 깨주면, 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돈을 벌어야만 부자이고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진실인지를 질문한다. 많은 돈이 있어도 불행한 사람도 있고, 없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음을 일깨움으로써, 돈이 있고 없는 것이 곧 행복인 것은 아님을 일깨운다. 돈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돈에 대한 내 생각, 해석, 분별, 의식이 나를 풍요롭게도 하고 가난하게도 함을 일깨운다.
대승불교와 선(禪)에서는 진리, 법을 불성(佛性), 본래면목이라는 가명(假名)으로 부른다. 바다 위에서 인연 따라 파도가 치듯, 이 세상 만물은 불성의 바다 위에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생멸법(生滅法)일 뿐이다. 선의 깨달음은 자기의 본래면목이 바다임을 깨닫는 것이고, 이를 깨달았을 때 모든 파도는 그대로 바다일 뿐이다.
부자도 가난도, 소유도 무소유도 모두 텅 비어 공적한 바다 위에 인연 따라오고 가는 물결, 파도일 뿐이다. 바다의 자리에 있으면 모든 파도가 곧 바다이다. 바다라는 진리에서는 부자와 가난, 소유와 무소유라는 파도를 분별하지 않는다. 그저 인연 따라 쓸 뿐이다. 이것이 불교가 부와 가난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다.
무엇이든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가져다 쓴다. 옛 선사 스님들께서는 ‘일이 없으면 쉬고, 인연을 만나면 베풀 뿐’이라고 일상사를 설했으며, ‘깨달음이 있는 이라면 하룻밤에 황금 만 냥을 써도 쓴 바가 없다’라고도 했다. 그 모든 것이 파도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의 자리에서 보면, 사실 완전히 무소유일 때, 완전하게 전부를 소유하게 된다. 나의 본성을 깨닫는다면, 본래부터 일체가 둘이 아님이 밝혀진다. 가난과 부자, 소유와 무소유는 환상이며 분별이었을 뿐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깨지지 않는 진정한 부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이 이법계(理法界)의 진실이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사법계(事法界) 또한 외면할 수는 없다. 현실에서는 누구라도 돈이 없으면 괴롭다. 돈이 없어 괴로운 현실에서 괴롭지 않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의 자리에서 본다면, 부자에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 나아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서 본다면, 가난과 부자, 소유와 무소유가 온통 진리 하나일 뿐이어서, 어떤 것도 상관이 없다. 비로소 양변 모두에서 훌쩍 벗어난 것이다.
그간 우리는 불교에 대해 ‘무소유’ ‘가난’의 종교인 것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오해해왔다. 이번 기획을 통해 치우침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중도의 안목이 깃들길 기대해 본다.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1729호 / 2024년 5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22698
[불교사의 주역, 상인] 4. 붓다는 왜 부자로 살라고 했나?
부에 대한 집착 없이 능동적으로 돈 버는 중도적 부자 지향
재가불자에게 ‘열심히 노력해 부자 돼라’ 여러 경전서 반복
소유 부정하지 않고, 무소유만 취하지 않는 무분별지 강조
불교, ‘무소유·가난의 종교’라는 오해 벗어나 자유자재해야
사람들은 ‘부자’ ‘상인’ ‘경제활동’ ‘돈’ 등의 키워드는 불교와는 동떨어진 주제일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정말 그럴까?
세계종교 가운데 유교 등은 농업 기반의 종교이고,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은 유목 기반의 종교인 데 반해, 불교는 농업사회에서 상업사회로 전환되던 그 격변기에 등장한 상업 기반의 종교다. 불교는 파사현정(破邪顯正)과 혁신성, 머무는 바 없이 무상한 변화에 적응하며, 고정되지 않고 활짝 열려 있는 종교라는 점 등에서 현대 사회와 같은 급변하는 시대에 매우 잘 맞는 종교이다.
인도 사회에서 사성 계급 가운데 평민이었던 바이샤 계급의 상인이 상업을 기반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사회 전면에 등장했으며, 이 부자들이 주목했던 종교도 역시 불교였다. 불교 최초의 사원도 장자라 불리는 이 상인들이 기부한 땅에 왕이 건물을 지어 창건되었으며, 스님들은 무역 상인들을 따라 낮에는 함께 이동했고, 밤에는 설법하며 상인들과 상부상조하면서 전법을 이어나갔다. 불교야말로 급변하는 상업 사회, 경제사회에 기반을 둔 종교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불교를 고리타분하고 형식적이며 무소유만 강조하는 종교로 오해했을까? 한국 사회에서 불교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틀은 ‘무소유’의 필터가 매우 강했다고 본다. 심지어 스님이 아닌 재가불자조차도 돈과 부자와 경제력을 좇아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돈을 벌고, 경제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정말 욕망이기만 한 것일까? 부자가 되는 것은 불교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일까? 불교는 돈과 경제활동을 부정했을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별역잡아함경’의 ‘사치하지도 너무 검소하지도 않고 그 중도를 취해야 한다’라는 말이나, ‘잡아함경’의 ‘어떤 선남자는 재물이 풍부하면서도 그것을 쓰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며, 굶어 죽는 개와 같다고 한다’라는 것에서도 사치와 인색, 부와 가난 어느 양변에도 치우치지 않는 면모를 볼 수 있다.
맹목적으로 불교의 이미지를 무소유의 종교로만 보아왔지만, 사실 불교는 소유와 무소유, 부자와 가난 어디에도 치우침 없으면서도 인연 따라 부자도 쓸 수 있고 가난도 쓰는 자유자재한 가르침이다.
오히려 부처님은 재가자들에게는 더없이 열심히 노력하여 ‘부자가 돼라’ ‘돈을 벌라’라고 말했다. ‘별역잡아함경’에서는 ‘벌이 온갖 꽃을 채집하듯 밤낮으로 재물을 얻으라’고 했고, ‘증일아함경’에서는 ‘재물을 현재에 가지면 한량없는 복을 얻을 것’이라 했으며, ‘중아함경’에서는 ‘마땅히 먼저 기예를 익혀라. 그래야만 재물을 얻게 된다’고 했다. 또한 ‘잡아함경’에서는 ‘저 늙은 부부가 젊었을 때 건강한 몸으로 부지런히 재물을 구했더라면 슈라바스티 성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고, ‘중아함경’에서는 ‘능히 자기도 기르고 부모, 처자, 노비, 하인들도 안온하게 하라’라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까? 어떤 마음으로 부자가 되어야 할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란 과연 무엇일까?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즉 돈에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 없이 돈을 벌고자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적인 부자다. 돈에 집착하며 돈을 벌면 괴롭다. 못 벌면 어쩌지 해서 괴롭고, 있어도 더 벌고 싶어서 괴롭고, 미래를 위해 더 많은 돈을 준비해야 해서 괴롭다. 그러나 부자라는 결과에 집착 없이 번다면, 벌면 벌어서 좋고, 못 벌면 못 벌어도 좋다. 원하되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지금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과도하게 원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결과에 상관없이 매 순간 부자로 사는 길이다. 여기에는 순수한 경제활동에 대한 열정이 있지만, 집착과 그로 인한 괴로움이 없다.
돈에 집착이 없으면 게으를 것이란 생각은 편견에 불과하다. 집착 없이 행할 때 방일하지 않게 오히려 순수한 열정으로 행한다. 사실은 집착하고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수동적인 삶이다. 집착하는 그것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집착과 추구를 내려놓으면 전체를 향해 완전히 열린다. 무한 가능성을 향해 최선을 다한다. 부자를 집착하는 대신, 선호한다. 그럴 때 두려움 없이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게 된다. 하되 함이 없이 할 때, 그 함에 무위의 진정한 힘이 붙는다.
불교의 중도는 그 어떤 것도 취사간택하지 않는다. 취부득사부득(取不得 捨不得),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다. 소유를 버리지도 않고, 무소유만을 취하지도 않는다. 인연 따라 소유도 쓰고, 무소유도 쓸 뿐이지만,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사실 불교에는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정하는 것도 없고, 주장하는 바도 없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견해를 깨뜨릴 뿐이다. 부자에 치우쳐 집착하는 사람에게 그 사로잡힌 욕망을 깨주듯, 무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깨뜨린다.
제법실상(諸法實相), 현실이 곧 진실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며,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다. 현실인 이곳이 곧 불국토다. 현실의 괴로움만 제거하면 본래 현실이라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것이 불교의 총정리 교리인 사성제(四聖諦)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면 괴로움의 소멸이 곧 해탈이고 열반이다. 괴로움의 제거를 위해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설할 뿐이다.
무엇이 괴로움인가? 돈을 더 벌기를 원하는 마음이 나를 괴롭게 한다. 그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집착을 깨주면, 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돈을 벌어야만 부자이고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진실인지를 질문한다. 많은 돈이 있어도 불행한 사람도 있고, 없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음을 일깨움으로써, 돈이 있고 없는 것이 곧 행복인 것은 아님을 일깨운다. 돈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돈에 대한 내 생각, 해석, 분별, 의식이 나를 풍요롭게도 하고 가난하게도 함을 일깨운다.
대승불교와 선(禪)에서는 진리, 법을 불성(佛性), 본래면목이라는 가명(假名)으로 부른다. 바다 위에서 인연 따라 파도가 치듯, 이 세상 만물은 불성의 바다 위에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생멸법(生滅法)일 뿐이다. 선의 깨달음은 자기의 본래면목이 바다임을 깨닫는 것이고, 이를 깨달았을 때 모든 파도는 그대로 바다일 뿐이다.
부자도 가난도, 소유도 무소유도 모두 텅 비어 공적한 바다 위에 인연 따라오고 가는 물결, 파도일 뿐이다. 바다의 자리에 있으면 모든 파도가 곧 바다이다. 바다라는 진리에서는 부자와 가난, 소유와 무소유라는 파도를 분별하지 않는다. 그저 인연 따라 쓸 뿐이다. 이것이 불교가 부와 가난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다.
무엇이든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가져다 쓴다. 옛 선사 스님들께서는 ‘일이 없으면 쉬고, 인연을 만나면 베풀 뿐’이라고 일상사를 설했으며, ‘깨달음이 있는 이라면 하룻밤에 황금 만 냥을 써도 쓴 바가 없다’라고도 했다. 그 모든 것이 파도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의 자리에서 보면, 사실 완전히 무소유일 때, 완전하게 전부를 소유하게 된다. 나의 본성을 깨닫는다면, 본래부터 일체가 둘이 아님이 밝혀진다. 가난과 부자, 소유와 무소유는 환상이며 분별이었을 뿐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깨지지 않는 진정한 부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이 이법계(理法界)의 진실이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사법계(事法界) 또한 외면할 수는 없다. 현실에서는 누구라도 돈이 없으면 괴롭다. 돈이 없어 괴로운 현실에서 괴롭지 않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의 자리에서 본다면, 부자에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 나아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서 본다면, 가난과 부자, 소유와 무소유가 온통 진리 하나일 뿐이어서, 어떤 것도 상관이 없다. 비로소 양변 모두에서 훌쩍 벗어난 것이다.
그간 우리는 불교에 대해 ‘무소유’ ‘가난’의 종교인 것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오해해왔다. 이번 기획을 통해 치우침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중도의 안목이 깃들길 기대해 본다.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1729호 / 2024년 5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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